예의의 관계와 애정의 관계
나와 타인은 대개 교집합이 없는 두 원과 같다. 그래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중간까지 서로 마중을 나가야 한다. 우리는 그 마중지점을 ‘예의’라 부른다. 예의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계의 문법이다. 내가 그 지점에 마중 나가 상대방을 기다리는데 상대방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화를 낼 권리를 얻는다. 이러한 예의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significant other)이 되면, 너와 나 사이에 교집합이 생긴다. '너‘의 행위가 ‘나’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나의 권리와 너의 권리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너의 권리를 지켜주는 일이 내 권리의 희생을 전제할 때가 많다. 따라서 예의의 관계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에 속했던 권리는 그저 서로의 행복과 불행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조금쯤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 즉 애정이 아니면 성립되기 어렵다. 나는 이를 ‘애정의 관계’라 부른다.
애정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점에서 부딪히게 된다. 그 점들은 모여서 선이 된다. 그 선에 맞추어 두 사람은 스스로를 얼마쯤 잘라내야만 한다. 그래서 관계란,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교환하면서 그 지점들을 피해 우리만의 곡선을 그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마지노선을 지켜주기 위해 내 무엇을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를 가늠해나가는 것이 연애라 하겠다.
비극은 서로의 마지노선이 부딪힐 때 발생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마지노선을 깎아내면서라도 상대를 붙잡을 것인지 아니면 손을 놓을 것인지를 선택해야한다.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각자 포기할 수 있는 영역, 그 벼랑 끝에 앉아 오래 대화해야 한다. 그 이후에 관계의 향방이 결정된다. 서로 자신의 마지노선을 깎으려는 의지와 노력만 보여도, 그 관계는 축복받았다 하겠다. 그렇게 그들만의 굴곡을 깎아낸 둘은 처음부터 비슷한 굴곡을 가졌던 둘과 근원적으로 다르다. 그 단단함과 유대감, 애정 모두.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애정의 관계지 예의의 관계가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상대방에게 깎아냄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깎아낼 의무가 없다. 애정의 관계에 예의의 문법을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에게 ‘당연히 해야 할 것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선고를 내린다. 상대방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그러지 않는 편이 낫다. 예의로 깎아 만든 굴곡은 후회와 미련을 동반한다. 후회되는 관계는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보다도 악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