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떤 기고문을 읽었다. 한 번 읽고 몇 번을 더 읽었다.
'경도되다'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단어는 아닌데, 이 글을 읽은 내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나는 이 글을 읽고 위안받았다.
'평범함의 위대함, 새로운 세계 질서를 생각하며'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이렇게 6개 단락으로 되어 있다.
1. 광주
2. 촛불 혁명, 다시 광주
3.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
4. 평범함을 위한 평화
5. 포용적 세계질서를 향하여
6. 평범함의 위대함
한국의 현대사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수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3.1 운동부터 광주 민주화 운동, 촛불 혁명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바꿔온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지난 3월,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여건이 되지 않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유골이 안치된 국립 이천 호국원을 찾았다. 2004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기 때문에 이천 호국원에 모셨고, 할아버지 옆자리에 할머니를 위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생전 할머니는 친척들이 다 모인 잔칫날이나 명절에 가끔 눈물을 흘리셨다. 좋은 세상을 다 못 보고 전쟁 중에 폭격으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 때문에 우신 거였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 철산이다. 북한의 국경도시 신의주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곳이다. 해방 후, 이념 갈등이 치열해지면서 할아버지 가족은 온 가족이 남쪽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먼저 서울 외삼촌댁에 가 있어라. 재산 등 정리하고 3일 뒤에 뒤따라 갈게' 하고 장남이었던 할아버지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이 가족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사연은 재미교포 의사 정동기의 자전적 수기 '3일의 약속'과 같은 이야기다. 이 수기는 91년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즈음부터 명절에 제사를 지낼 때면, 할아버지는 절을 하려고 엎드렸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엎드린 채로 한참을 우셨다. 그때의 흐느낌,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눈물방울을 나는 여전히 슬프게 기억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기가 참 어려웠던 시절.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항상 어떤 입지전적 인물의 성공스토리에 함몰되어 있었다. 아주 많은 돈을 번 사람들, 위대한 업적을 만든 사람들을 보며,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그리고 구체적 노력 없이 그런 성공을 열망하기만 했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나의 모습에 쉽게 좌절했다. 이다음 단계는, '그래 나는 별 것 아니고 평범하다. 위대한 일,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하늘이 내려 준다. 그냥 따라가면 되는 거다.'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귀결된다. 사회 구성원, 한 직업인으로서의 개별적인 존재로 나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여기게 되기보다는 그냥 큰 흐름에 몸을 맡기고 따라가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영웅시한다. OOO성공담, OOO신화 등으로 포장하고 나는 이렇게 훌륭하니 너희들은 그냥 다른 생각 말고 나를 따르라 말한다. 이러한 지도자 유형이 꼭 정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 생활, 학교, 오래전 다니던 교회에서도 이러한 사례를 본 경험이 많다. 신화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해서 영향력을 끼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은 다르다. 이 기고문의 4. 평범함을 위한 평화는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동양에서는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난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영웅은 탄생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불행에 빠지는 시대입니다.
중국의 고전 ‘사기’의 ‘손자 오기 열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人曰, 子卒也, 而將軍自吮其疽, 何哭爲”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들이 졸병인데 장군이 몸소 아들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주었소. 어째서 우는 것입니까?” 울 필요가 없는데 왜 우느냐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장군의 행동에 감격해 전쟁터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죽을까 봐 운 것입니다. ‘사기’에는 그 어머니의 남편 또한 똑같은 일을 겪고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죽었다고 나옵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장군 오기의 훌륭한 행동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남편을 잃은 부인의 안타까운 처지가 행간에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웅담에는 항상 스스로의 운명을 빼앗긴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이 감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6. 평범함의 위대함 단락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것, 일상 속에서 희망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여기에 새로운 세계질서가 있습니다. 역사책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 이름이 아니라 노동자나 나무꾼, 상인이나 학생 등 일반명사로 나오는 사람들, 이 평범한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이름으로 불려야 합니다, 세계도, 국가도, ‘나’라는 한 사람으로 비롯됩니다. 일을 하고 꿈을 꾸는, 일상을 유지해가는 평범함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을 우리는 소중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기고문이다. 언론과 야당에서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난받는 대한민국 국가 지도자의 글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영웅이 되려고 내 달리고, 악다구니를 할 때 대통령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내재적 가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아 개개인이 행복하고 소중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존중받는 것 나라로 가는 과정. 난 이 과정에 지극히 평범한 개인으로 기쁘게 동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