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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PI May 15. 2022

싸운 연인 골목

오늘 걷다가 으슥한 골목길에서 싸우고 있는 연인을 마주쳤다.

예전에는 쉽게 스트리트 파이터들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팬데믹으로 사람 볼 일 자체가 줄어드니 그런 일도 같이 줄어버렸다.

씁쓸한 일이다.

그러다 오늘 싸우는 연인들을 보니 어쩐지 반가운 마음에 마스크 안으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제는 길거리에서 싸우는 연인을 볼 수 있을 만큼

길 위에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 areksan, 출처 Unsplash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단 걷도록 한다.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계단도 피하지 않고 다부지게 걷는다.

백화점 안을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학교 운동장에 들어가서 걷기도 한다.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길을 걷기도 하고 도저히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에서 사람에 끼어

가기도 한다.

둘이 나란히 걷는 것도 좋아하고 여러 사람과 떠들며 걷는 것도 좋아한다.


군대에서도 행군만은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별난 일이다.

걷는 것은 그다지 가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역시 혼자 걸은 시간이 훨씬 많을 것이다.


혼자서 걸을 때는 음악을 듣지 않고 통화도 자제한다.

가능한 바깥 풍경을 관찰하며 도도히 걷는다.

시간도 많으니 가보지 않았던 길로도 걸어보고 낮에 갔던 곳을 저녁에도 가본다.


어릴 때는 걸으면서 공중전화부스나 우체통이 있는 자리를 기억해 두고는 했었다.

혹시 길을 잃을 때를 대비했던 것이다. (개가 산책을 할 때 소변을 뿌리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요즘은 대피소나 공중화장실을 기억해 둔다.

천재지변이나 전쟁 발생, 급변하는 생리 현상의 대비책이다.


많이 걸으면 먹는 것에 비해서 살이 찌지 않고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거야 많이 걸으면 칼로리 소모가 되니까 살은 찌지 않을 테고,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력은

비교 대상을 찾기가 어려우니 쉽게 체감하기 어렵다.


딱히 어떤 이유에서 걷는 것은 아니지만

걸으면 유행의 변화나 계절의 변화를 보다 빠르게 체감할 수 있다.

잡지를 읽거나 뉴스를 보는 것보다 빠르다.

실제로 일본에서 받았던 VMD 수업에서 시장의 흐름을 보다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장 조사할 것을 강조했었다.

유행이나 계절이 변하는 미묘한 감각을 체감하는 것은 나로서 재미있는 일이고 일상에서 제법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많이 걸으면 지도를 보고 그리는 것에도 능숙해진다.

지도의 좌표값을 몸으로 기억해내기 때문에 구글맵이나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지 않고

더 빠른 길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간혹 주변에서 몇 년간 운전을 했던 곳에서

혹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던 곳에서

내비게이션의 오류나 대중교통이 끊어져 택시가 잡히지 않는 상황이 오면

처음 보육원에 내맡겨진 아이처럼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는 주변을 많이 걸을 것을 추천한다.

중증으로 길을 못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마트폰에 너무 의지한 탓이다.

길 위에서 무관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는 상황에서 당황해하는 것이다.


스스로 길을 찾고 걷는 일만으로 외부에 의지하는 소심하고 약한 마음이 변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떤 것을 암기할 때 오감의 감각 정보를 각각 따로 저장해서 이어 붙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걸을 때 두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저장하고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꼭 장면만이 아니라 그 길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상황으로도 기억하기 때문에

공간이 신도시 개발구역처럼 급변하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오래간만에 방문하는 공간에서도 금방 기억해낸다. *소위 구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전거나 수영을 한 번 배워두면 몇 년이 지나도 금방 기억해내는 것과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길을 다니지만 그 길은 저마다 장면이 있고, 상황이 있고, 사연이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다른 길을 걷는 셈이다.


걷다 보면 쓰러진 사람을 부축해줄 때도 생긴다. 교통사고가 날 것 같은 아이를 잡아주는 일도 종종 생긴다.

우연히 돈을 줍는 날도 있고 걷다가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일도 있다.

오늘처럼 싸우는 연인들을 만나기도 한다.


자신이 다니는 길마다 그런 식으로 이름 붙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천 원 주운 길, 애 구한 횡단보도, 싸운 연인 골목...


"응. 난데, 싸운 연인 골목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도저히 길거리에서 연인과 싸울 용기가 없을 것 같지만.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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