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리뷰
※ 스포 과다 ※
해미의 말처럼 ‘문제’는 항상 있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지 못한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수많은 ‘문제’들의 명확한 원인을 잘 모른다.(알아보려 노력한 적이 아직은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문제’들은 그 원인으로 추측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진짜 원인을 가려내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종수에게 주어진 문제, ‘해미는 왜 사라진 것일까?’도 마찬가지다. 추측할 수 있는 원인은 다양하다. 동료가 말했듯 빚에 쫓겨서. 창녀라고 한 종수에게 상처 받아서. 가족들의 말처럼 원래 그런 애라서. 아니면, 벤이 죽여서. 거대한 미스터리 같다.
무엇이 해미를 사라지게 만든 진짜 이유인지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난다. 주인공 종수가 찾은 답은 벤이 죽였다는 것. 이 답을 찾기 위해 종수는 치열하게 달린다. 해미의 동료도, 가족도, 하지 않은 실질적인 행동을 한다.
비닐하우스를 정기적으로 태운다는 벤의 말에, 종수는 몇날 며칠 숨 가쁘게 뛰며 ‘집주변’의 비닐하우스를 뒤진다. 그러나 비닐하우스는 텅 비어있을 뿐이다. 답을 알고 싶은 종수가 아무리 그 안을 들여다봐도 말이다. 그는 결국 서울에 가, 벤에게 묻는다. 비닐하우스를 태웠냐고. 벤은 태웠다고 말한다. 사라진 비닐하우스가 없는데,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는 있는 것이다. 종수는 답을 찾으려면 ‘집주변’의 애꿎은 비닐하우스를 벗어나야 함을 느낀다.
사람이나 집단이 문제에 처하거나 불만을 가질 때, 가장 쉬운 방식은 내 ‘주변’의 무언가를 탓하는 것이다. 육아휴직을 쓰고 나에게 일을 떠넘기고 가버린 옆 팀의 대리님, 군대 제대하더니 꼰대처럼 변해버린 우리 과 선배 등, 가까운 주변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종수가 작은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금세 활활 타버리는 비닐하우스처럼, 그들은 나를 이렇게 곤란에 빠뜨릴 만큼 강인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저 나와 같은 누군가일 뿐. 종수는 이제 집주변의 비닐하우스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종수가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달려온 서울은,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집(House) 혹은 사람들의 마음을 비게 만드는 도시다. 벤이 배부르게 밥을 먹으며 속을 채우는 갤러리에서, 종수는 불타는 용산 참사 벽화를 바라본다. 남의 집을 채울 물건을 전달하는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에서, 사람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린다. 해미가 살았던 서울의 그 집은, 햇빛 한 쪽 겨우 나눠받는 곳이었다. 어느 한 곳은 채워져만 가는데, 어느 한 곳은 비어져만 간다. 마치 벤이 말한 당연한 ‘자연의 섭리’처럼 말이다.
그러나 벤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 저수지가 인공호수인지 아니면 자연호수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불균형 또한 자연의 섭리인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결국 종수가 마지막으로 택한 것은 벤의 집의 서랍을 열어보는 것이다. 그 서랍을 조금 더 ‘채우는’ 핑크색 시계(해미의 것으로 추측되는)를 발견하고서야 종수는 자신의 진실에 성큼 다가간다. 종수는 한 개인으로서 개인을 곤란에 빠뜨린 무언가를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개인은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무한정 보고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만 진실 비슷한 무언가라도 알 수가 있다. 해미는 아니더라도 결국 ‘보일’이가 그 집에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또 그제야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종수가 진실의 중심에 조금이나마 다가갔기 때문이다. 종수는 벤이 말한 것은 결코 ‘자연의 섭리’가 아니며, 누군가가 자행한 삶의 탈취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종수는 자신 주변의 애꿎은 공무원과 부인만을 공격하던 아버지의 칼로 벤을 찌른다. 벤이 해미를 죽였을까? 관객인 우리는 알 수 없다. 벤을 죽이면 희생자들이 이젠 생겨나지 않을까? 관객인 우리는 알 수 없다. 종수는 결국 아버지처럼 이상한 곳에 분노를 표출한 한 개인으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관객인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소설가가 된 종수는 알고 있다. 본인이 찾은 진실이 무엇인지. 그 진실을 보기 전과 보고 난 후에 자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달라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소설을 써야하는지.
그래서 이 영화는 미스터리 같은 세상을 사는 모두를 위한 차가운 위로이다. 종수처럼 달리지 않으면 결코 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없다는 경고이자, 종수만큼만 달리면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지도 모른다는 덕담. 세상의 진실에 대해 그저 관객으로 남을 것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 ‘버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