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는 것은 지적인 활동이다.
요새 자주 가는 예쁜 독서모임 공간이 있다. 방마다 사람들이 앉아 책이야기를 하는 그 곳은 원래 룸살롱이었다고 한다. 들어서면 지적인 공기가 흐르는 공간이 원래 그런 곳이었다니 믿기 어려웠다. 공간은 무엇을 비우고 어떻게 채우냐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 나는 2년 간 산 집의 연장 계약을 하면서 대청소를 했다. 청소를 하며 총 120리터의 쓰레기를 비웠다. 가득 찬 쓰레기통을 보며 생활 습관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휴대용 칫솔 세트가 정말 많았고, 안 읽은 책도 많았으며, 물론 사놓고 입지 않은 옷들도 있었다.
10년에 가까운 자취생활을 하며 공간을 써보기만 하고 채워보지를 않았다. 어차피 이곳이 내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아는 뜨내기의 마음으로, 방을 구하러 가면 ‘수압’부터 최우선으로 체크했다. 이사할 때 편하도록 짐은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했다. 그러니 스탠드 조명, 예쁜 접시, 사이드 테이블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20살 오빠와 함께 살던 내 자취방에는 행거와 책상, 이불만 있었다.
공간을 채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쉴 곳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집은 쉴 곳처럼 느껴진다기보다 베이스캠프 같았다. 부셔진 청록색 플라스틱 서랍과 누런 에어컨, 일회용 용기로 만든 수세미 거치대 등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우리 집에 놀러오면 지적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이 그 모양새로 우리 집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았다. (진짜로.) 그저 열리면 서랍이요, 시원하면 에어컨이다라는 마인드로 물건의 쓰임에만 집중한 삶이었던 것이다. (내가 좀(많이) 무심하기도..)
공간을 쓰는 것(use)과 달리 채우는 것은 지적인 활동이다. 현재 나의 생활습관, 내가 어떤 생활을 지향하는지, 나에게 필요한 물건과 필요 없는 물건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방면을 고려해야 할 수 있는 행위다. 이번에 청소를 하면서 처음으로 집을 채우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다. 물건을 쌓는 방향, 쓸모 없는 물건과 쓸모 있는 물건을 구분하는 것, 새로 사야하는 물건의 목록을 세우기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해 청소를 했다. 아무렇게나 쓰던 물건들이 제 자리의 위치로 돌아가 제대로 채워졌다. 덕분에 작은 방에도 공간의 구획(글쓰는 곳, 화장하는 곳 등)이 생겼다. 쉽지 않은 일이여서 총 3일의 청소기간이 걸렸다.
휴먼 스케일에 적합한 거리를 우리는 걷기 좋다고 느낀다고 한다. 가로수길, 익선동 같은 곳들. 사람의 덩치에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폭을 지니고, 작은 가게들이 많아서 조금만 걸어도 또 새로운 이벤트가 등장하는 곳들이다. 이런 곳들을 우리는 '데이트 하기 좋은 장소'로 꼽는다. 공간을 '쓴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을 때는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돌이켜보면 무질서한 공간에 지배를 받던 것은 나였다. 좀더 생활습관이 안 좋아졌고, 가끔 우울했으며,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장소에 따라 데이트의 성패가 갈릴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향기가 나는 디퓨저를 처음 연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 더 기대됐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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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버리기 아까운 책들을 나눔합니다...
(백의 그림자, 생각의 좌표, 행복의 정복,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라틴어 수업 나눔 완료)
욕망의 진화: 연애 욕구 떨어뜨리고 싶을 때
협상의 신: 협상 자주 하시는 분
사랑의 생애: 사랑에 대한 촌철살인 많음
홀가분: 홀가분해지고 싶을 때
빅데이터가 만드는 비즈니스 지도: 빅데이터가 좀 궁금할 때
행복의 정복: 강추!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입문용
라틴어 수업: 인생을 아름답게 보고 싶을 때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딴 생각할 때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강추!
기회의 99%는 컨셉으로 만든다: 광고회사, 마케터, 카피라이터용 컨셉 입문용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퇴사하고 싶을 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 폐해가 뇌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싶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