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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an 30. 2024

신박하다

활짝 웃으며 화를 내는 사람

윗니 8개를 훤히 드러내놓고 활짝 웃으며 화를 내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런 미소에는 으레 한쪽 입꼬리가 위로 솟구쳐올라 비아냥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날 터이지만 그에게서는 그런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두 눈을 부릅뜨지도 않았고 까만 눈동자가 슬쩍 보일 만큼 감긴 눈꺼풀이 바가지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휘어지기까지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어떤 연유로 그가 이런 신박한 방식으로 화를 표현하게 되었는지를 상상해 보았다.     


1. 그는 있는 그대로 화를 표출했다가 된통 화를 당한 적이 있다.

2. 그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분노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3. 그는 너무도 정당한 자신의 분노가 상대방에게는 너무도 부당하다는 걸 인지했다.

4. 그는 인간에게는 함박웃음으로 응대하라는 매뉴얼이 입력된 로봇이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웃어대지 않으므로 아무래도 4번은 제외해야겠다. 한때 자신이 분노조절장애가 아닐까 의심해 본 나로서는 분노는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기침처럼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오는 것인데 어떻게 그는 기침을 참고 태연히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보란 듯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분노를 해소하고 있다는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웃음은 완벽한 연기가 아닌 명백히 화를 참지 않았던 결과물에 가까웠던 것이다.   

  

화가 나면 상대방이 나의 분노를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으로 내 분노 버튼이 달칵 눌러지는지 상대방에게 인지시켜야 같은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이 언행을 바꿔야 하는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만일에 나의 분노 버튼을 익히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일부러 나를 도발시키기 위한 언행을 한다면 그는 나의 화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할 명목이 생기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이 내 기준에 맞춰 행동해야 할 당위성도 굳이 나의 분노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화는 본인이 직접 해소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이왕이면 함박웃음과 같이 신박하고 차밍한 방식으로 분노를 해소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부사를 반복적으로 쓰는 것을 지양하지만 그의 방식이 아주 아주 맘에 들었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근간에 나는 선명했던 미간 주름이 옅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 365일 대부분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 지내다 보면 화낼 일이 전혀 없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분노는 대체로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의 기준과 다르고 기대하는 바에 못 미칠 때, 즉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      


그러나 평생 사람들을 마주하지 않고 살 수는 없으므로 분노를 구슬릴만한 잔재주가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나는 며칠 전에 설거지거리를 싱크대로 그대로 놔두고 출근하는 그를 마주하고 단전으로부터 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었다. 하지만 이내 ‘아니?! 저 새끼가 또 그냥 가버렸네?’하고 웃어 버렸다. 그의 퇴근 시간까지 그대로 방치하겠다는 마음을 품기도 했으나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온종일 그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차게 될 터였다. 그는 단지 나와 다르게 설거지를 하지 않고 출근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며 나의 분노를 붙들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웃으면서 설거지를 해치우면 될 일이다.      


웃음전도사임을 자청하며 웃으라고 강요하는 이들을 신랄하게 비아냥거렸던 나다. 그런데 지금 나는 화가 날 때 한번 웃어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신기하게도 화가 없어지진... 않고 대신 가벼워진다. 그까짓 게 내 미간에 주름을 생기게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인가. 아니다. 그럼 미간에 힘을 풀고 웃는다. 심지어 소리도 내본다. 하하하핫. 그럼 화를 내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두 번째 화살도 거뜬히 피할 수 있다.    

  

화에 붙잡혀서 얻는 소득은 없다. 오히려 상대방은 그 점을 간파하고 역으로 당신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대신 미간 주름이 옅어진다는 감각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활짝 웃으며 화를 해소해 보자. 당신의 미소로 상대방이 당신의 노력을 알아주리란 기대는 일절 하지도 말라. 적어도 미간 주름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게는 큰 소득이다.

작가의 이전글 MBTI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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