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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Apr 09. 2024

늦은 오후의 토막잠

늦은 오후의 산책

 해가 떨어져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갔는데 요즘은 벚꽃이 예쁜 관계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로 머리를 덮고 후디까지 뒤집어쓴 채 늦은 오후 산책을 즐긴다. 이러고 밤마실을 나갔다가 산책 나온 개들한테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터라 밤에는 오픈하고 다녀서 오랜만에 꽁꽁 싸맨 기분이 포근하니 좋다.     


부쩍 늘어난 관광객을 보며 또 한 번 봄을 실감했다. 관광객은 어떻게 해도 관광객티가 난다는 점이 귀엽다. 나란히 걷고 있는 두 남자의 뒷모습만 보아도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로를 향한 눈빛,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 치는 모습, 뺨에 키스를 하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며 벚꽃만큼이나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사람을 반짝이게 한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앳된 엄마 아빠는 아기를 번쩍 들어 올려 사진 찍기 바쁘고 대뜸 번쩍 올려진 아기는 이게 무슨 일인가 영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짧은 플리츠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천연덕스럽게 카메라를 향해 자연스러움을 연기하고 쭈그려 앉아서 연신 그 모습을 찍어주고 있는 남자가 있다. 

     

이상하리만치 감정의 동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바라보는 게 도대체 얼마만 인지.      


벚꽃은 찍지 않았다. 브런치에 올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면 사진은 안 찍게 되었다. 그 순간만으로도 충분해서 눈으로만 담아두려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다. 무엇을 해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순간 기분이 좋아지는 것에 집중한다. 무엇이든 당장에 기분이 좋아지는 쪽으로 행동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내겐 굉장히 큰 변화다.     

나의 쾌락은 스케일이 작으므로 시시때때로 시도할 수 있다. 직접 만든 소창행주를 과탄산수소에 푹 삶아서 뽀얀 자태로 만들거나 지난겨울 엄마, 아빠와 함께 만든 샛노란 유자차를 한밤중에 홀짝홀짝 마시거나 늦은 오후의 토막잠 같은 것들.     


퇴사 3년 차, 처음으로 늦은 오후의 낮잠을 시도해 보았다. 밤에 잠들지 못할 것이 두려워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겨우 떴을 때 아직 넘어가지 않은 오렌지빛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간 몰아치는 익숙해지지 않는 익숙한 두려움. 단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옆에 마땅히 있어야 할 엄마가 없다는 현실에 짓눌려 울음을 터트렸던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나 숨넘어가도록 서럽게 울었는지 놀란 옆집 아저씨가 달려와 나를 달래줬던 그때가.     


어른이 된 후론 좀처럼 대성통곡하지 않는다. 뛰쳐 와 줄 사람도 없다. 혼자서 꿀꺽꿀꺽 눈물과 공허함과 두려움을 삼킬 수밖에. 한동안 시간여행이라도 한 듯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억지로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4살짜리 푸바오도 엄마, 아빠 품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중국에 도착해서 찹찹 대나무를 잘도 먹는데 나는 참 엄살이 심하구나.     


앞으로 내게 남은 늦은 오후의 호사스러운 토막잠은 몇 번이나 되려나. 습관적으로 미래를 떠올리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집을 보러 오겠다는 부동산의 전화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게 될까. 그들도 나만큼이나 이 집을 사랑하며 살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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