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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un 18. 2024

고작 핸드폰 하나 바꾸면서

아이폰에서 S24로

 아이폰을 쓰지 않으면 그러고도 네가 디자이너냐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남성복을 디자인하는 일에 왜 아이폰이 필수요소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아이폰 유저가 되었다. 업계 사람들에게 구려 보이기 싫었으므로 삼성을 쓰면 디자이너의 감도가 떨어진다는 허세스러운 의견에 동조했던 거다. 그렇게 아이폰의 기능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아이폰의 감성만을 취하며 더 이상 디자이너도 뭣도 아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폰을 고수했다.     


최근 7년 된 반려 아이폰이 동기화 중에 먹통이 되면서 그제야 애플의 시스템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러나 삼성으로 갈아타기엔 내 안의 허세는 상당히 굳건했고 심지어 늙은이의 세계로 입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어떻게든 변화를 거부하려고 구실을 만들어대는 건 여전했다.     


오랫동안 해오던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대로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어서 아이폰을 삼성으로 갈아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겁을 먹는다. 그래서 굳이 굳이 수명이 다한 폰을 부여잡고 배터리까지 교체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폰은 또다시 배터리 문제를 일으켰다.      


내게는 삼성으로 갈아타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이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신규로 TV와 인터넷을 설치하면서 핸드폰 결합 할인까지 받을 수 있으므로 시기적으로도 매우 적절했다. 오버해서 말하자면 온 우주가 나에게 폰을 바꾸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보내줘야 한다고.     


올해는 오래된 것들, 특히 내가 집착했던 것들과 모두 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고작 핸드폰 하나 바꾸는 일에 온 우주를 들먹이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아무래도 올해는 그런 해인가 보다라고. 변화를 거부했을 때 좋은 일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변화의 길 앞에 서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바꿔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100번 망설였을 일을 10번 망설이고 지난주에 핸드폰을 바꿨다.     


나의 반려 아이폰은 ios 최신 버전이 적용되지 않아 데이터를 한꺼번에 옮길 수 없어 어플을 직접 설치해야만 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했던 짓을 또 해야 했지만 한번 해봤다고 이번엔 4시간이 아니라 3시간이 걸렸다. 작업을 끝내고 아이폰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 그토록 익숙했던 아이폰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화면이 이렇게 작았나? 원래 폰트가 이랬었나? 10년 넘게 익숙하게 사용했던 것도 단 몇 시간 만에 이걸 사용했던 때가 언제인지 모를 만큼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니.     


놀랍고 미안했고 반갑고 아쉬웠고 좋았고 좋지 않았다.      


‘폰을 바꿨다 -> 적응을 빨리했다 -> 신난다’의 단순한 감정 흐름을 탈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사는 것이 좀 가뿐해졌을까. 


최근엔 지금껏 살아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았다. 먹고 싶으면 먹었고 자고 싶으면 잤다.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샀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갔다. 바로, 지금, 여기의 감정을 깊고 길게 끌고 가려는 습관을 버리고 싶어서 당장 해결하고 다음에 밀려오는 감정이 무엇이든 기꺼이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항상 여운이 생겼다.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그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건 살아있다고 볼 수 없을 테니까. 다만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감정에도. 집착의 단계로 넘어가 헤어지게 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좀 덜 좋아하고 덜 싫어하고 덜 기뻐하고 덜 슬퍼하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잘 안된다. 나는 정말 좋아하고 정말 싫어하고 많이 기뻐하고 많이 슬퍼한다. 무생물에도 기어코 감정을 느끼고야 만다. 이것이 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면 그래, 고통스럽더라도 다시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고작, 핸드폰 하나를 바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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