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의이혼확인서를 받은 다음 날에 서울재즈페스티벌이 시작된 것은 내가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이혼한 다음 날 페스티벌에 혼자 갈 수 있다니. 정말 럭키비키잖아??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오트밀빵을 꺼내서 데우고 커피를 끓였다. 혀끝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 입에 먹을 것이 들어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꼭꼭 씹어 삼켰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 35분 SRT를 탔다. 이런 시간대의 기차는 출장 때도 타본 적이 없다. 누가 시킨다면 할 수 없을 짓이다. 지하철을 2번 갈아타고 이름도 괴상한 또타라커라는(또 지하철을 타서 라커를 쓰란 말인지?) 앱으로 지하철역의 물품보관소에 짐을 보관하고 공연장에 도착했다. 이미 뱀처럼 똬리를 튼 팔찌 수령 대기 줄이 땡볕 아래 길게 늘어져 있다. 오전 8시 40분이었다.
왼쪽 팔목에 팔찌를 끼고선 다시 공연장 입장 대기 줄에 합류했다. 무엇이 굴러다녔을지도 모를 바닥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가 철퍼덕 앉았다. 나를 중심으로 왼편에 앉아있는 여자애의 목소리가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고 귀여워서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좋았다. 반면 오른편에 앉아있는 여자들의 목소리는 괄괄하고 대화의 결도 사뭇 농후했는데 최태원 동거녀와 그녀의 엄마를 쌍첩이라고 칭하는 바람에 풋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최태원을 싫어하는 이유는 보유한 SK주식에 몹시 쳐 물려있어서지만 그가 변치 않는 양아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명언을 들을 때마다 전남편과 더불어 최태원이라는 사람을 떠올렸었다.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떠들었고 내리쬐는 햇볕은 뜨거웠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서늘하고 건조했고 하늘은 모처럼 만에 파랬다.
드디어 공연장에 입성한 시간이 대략 12쯤. 나는 그때부터 밤 10시 30분까지 스탠딩 존에 꼼짝없이 서 있게 된다.
혼자서 페스티벌에 간 건 처음이다. 그것도 화장실 이슈로 스탠딩 존을 지킬 수 없을까 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포도당 캔디를 먹어가며 11시간을 서서 버틴 건. 20대 때도 하지 않았던 짓을 지금에야 하나씩 하고 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사실은 일단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온 마음을 쏟아붓고 오랫동안 그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내뿜는 아우라와 에너지보다 매력적인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나는 줄곧 그것을 원해왔고 밥벌이도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사 후에 기저에 깔린 우울감의 상당 부분은 예전처럼 좋아하는 일을 다시 직업으로 삼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다시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주둥이로만 나불거릴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시도해 봐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무엇이든 조차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난감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난감할 뿐 두렵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근자감이 생겼다. 막말로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혼을 한 마당에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가 돼버린 거다. 혼자서 못할 일이란 이제 내겐 없다.
티켓 값이 만만치 않아서 숙소는 근처 저렴한 곳으로 예약했었다. ‘호텔’이라 명했지만, 그곳이 ‘모텔’이라는 것까진 알고 있었는데 아고다에서 본 전경과 실물이 이렇게까지 다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방 출장도 잦았던 터라 시골의 허름한 모텔에서도 거뜬히 잘 잤지만, 이곳은 그런 나조차도 입이 떠억 벌어질 만큼 놀라운 곳이었다.
화장실은 하정우가 피해자들 머리에 정을 박았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여기서 몇 명은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변기는 병을 얻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더러웠고 샤워를 하면 오히려 몸이 더러워질 것 같았다.
도어록은 어린아이가 몇 번 흔들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이 허술했고 벽에 걸린 에어컨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종이라 마치 예술작품 같이 느껴졌다. 곽티슈에 붙은 출장 마사지 스티커를 보면서 그래, 지금 마사지받으면 참 좋을 텐데. 근데 이 마사지는 그런 게 아니겠지. 어쩌나. 슬럼가의 살인율이 높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는구나. 나 돈 벌어야겠구나.
다행히도 침대 시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불속으로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아 침대 위에 시체처럼 바르게 누워 가슴 위에 두 손을 포개고 스위치를 꺼도 꺼지지 않는 주황색 조명을 바라보며 잠들었다. 설마 진짜 살해당하기야 하겠어?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살았다. 싱글 첫날부터 참으로 흥미진진한 하루였다. 역시 나는 럭키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