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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un 04. 2024

아마도, 마지막 법원

이상한 날이었다.

 한 달의 숙려 기간이 끝난 5월의 마지막 목요일. 마지막으로 법원을 갔다. 결혼생활 동안 이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판사 앞에서 이혼 의사를 확인받는 그 순간에 내 입에서 ‘네’라는 대답이 나올 때 나의 기분이 어떠할지를.    

  

2번째 찾는 법원이지만 또 한바탕 길을 헤맸다. 서류 접수 때와는 다르게 보안검색대를 통과하여 2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구나. 흉기 같은 걸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구나. 소문대로 사람들이 바글댄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 길을 헤매다 마주친 굳은 표정의 남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부부였던 두 사람이 함께 신분증을 가지고 접수해야 하는데 끄트머리에 서 있는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16’이라는 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받아 들고 빈 좌석을 찾아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일은 이제 없겠지. 이게 마지막이겠지. 한때는 누구보다 편안함을 느꼈던 사람이 이렇게 숨 막히도록 불편해질 수 있다니. 나는 끝까지 쿨해질 수는 없는 모양으로 가슴 언저리가 다시 한번 뻐근해짐을 느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젊은 부부는 맛집 웨이팅을 하는 것처럼 도란도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불이 불거져 나온 깡마른 남자와 기미가 시커멓게 뒤덮인 여자가 나와 그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다. 머리 깎은 스님도 있다.      


곧이어 번호표를 부여받은 사람들 모두 대기실로 입장하라는 안내를 받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그와 멀찍이 떨어진 좌석을 골라 앉았고 좌석이 모자라서 대기실의 3면을 사람들이 빙 둘러섰다.    

  

대기실을 꽉 채운 사람들 모두 핸드폰을 보지 않고 빈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고 웃겨서 좀 웃었다. 판사 앞에 가기 전에 주의사항을 들었다. 이곳에서 확인서를 받은 뒤에 구청에 신고할 때도 부부가 함께 가야 하며 상대방의 도장을 훔치거나 위조할 경우엔 처벌을 받으니 그런 짓은 시도하지 말라고. 그래서 또 조금 웃었다. 훔치기도 하는구나. 그리고 생각보다 확인 과정이 빨리 끝나니 놀라지 말라는 어투에서도. 다들 너무 빨라서 놀랐구나 싶어서.      


번호가 하나씩 불린다. 갑자기 심장이 콩닥거린다. 차례를 기다리는 일은 뭐가 되었든 간에 떨리는구나. 16번이 불렸다. 판사 앞에 빈 의자 2개가 있다. 서류 더미 옆에 앉아있는, 살면서 처음 마주한 판사는 동네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가는 할아버지 같이 생겼다. 온화한 미소로 나와 그에게 이혼 의사가 확실한 것인지를 물어본다. 수십 번 상상했던 그 장면이다.      


나는 판사의 눈을 응시하며 ‘네’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끝났다.      


제출했던 신분증과 확인서를 받아 들고 나왔다. 확인서에는 ‘위 당사자는 진의에 따라 서로 이혼하기로 합의하였음을 확인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번에는 부산 3대 밀면 중 하나라는 ‘국제 밀면’을 찾아갔다. 또 길을 헤맸다. 국제 밀면은 전에 갔던 서울 왕돈가스와는 분명 다른 곳에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한번 갔던 그 길로 계속 가려고 해서 법원 주위를 자꾸 뱅뱅 돌았다. 그 길은 이 길과는 다른데 말이다.

 

처음 맛본 국제 밀면은 단맛, 신맛, 매운맛, 짠맛의 밸런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서 오히려 맛이 없다고 느껴졌다. 밀면의 표준 같은 맛이었지만 완벽한 만큼 개성이 없었다. 잘게 찢어진 장조림같이 조려진 고기 고명이 이 밀면을 살렸다고 생각했다.       


국제 밀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혼자 밀면을 먹던 남자와 또 길에서 마주쳤다. 아마도 다시는 없을 이상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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