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되고 주책스러운 욕구
오른쪽 눈썹 앞머리에 매우 크고 단단한 무언가가 솟았다. 나라는 인간은 피부마저 개복치 같아서 하루 걸러 한 번씩 크고 작은 뾰루지가 생기므로 보통은 직접 해결하지만, 녀석의 기세가 대단해서 병원을 찾았다. 내심 건강보험 적용되는 놈으로 기대했건만 실망스럽게도 그저 커다란 여드름이었다. 여드름 하나 짜는데 5만 원을 썼다. 돈이 술술 잘도 나간다.
돈이 술술 나갈 일은 앞으로도 무궁하게 있을 예정이다. 지난주부터 인테리어 리모델링 업체를 알아보고 있다. 다시 이 즐겁고도 괴로운 과정을 겪을 생각을 하니 즐겁고도 괴롭다. 처음 리모델링을 맡겼던 업체는 요청사항이 있을 때마다 잠수를 타는 통에 살이 3kg가 빠졌고 2번째 업체는 연락은 기가 막히게 빨랐지만, 시공 능력이 기가 막히게 떨어져서 집 곳곳에 하자가 발생했다. 그간에 생긴 불신으로 이번에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업체를 선정하고 싶었지만 일이 매끄럽게 진행이 되질 않았다. 역시 거저 얻으려 하면 안 된다.
최근 시세가 감이 오질 않아서 우선 몇 군데 견적을 요청했는데 요즘은 현장 견적만 내주는 분위기인지 다들 미적지근했고 그나마 액션이 빠른 업체가 가견적을 내주겠다고 해서 망설이지 않고 업체로 찾아갔다.
올 수리된 아파트는 매매 시 값을 더 받을 수 있다기보다는 단지 선택의 기회가 많아질 뿐이라 전체를 수리할 생각이 없고 그럴 돈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새 취향이 많이 바뀌었다. 신혼집같이 모든 것이 새것으로 교체된 완벽하고 말랑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싫어하게 되었다. 벽처럼 숨겨진 하얀 수납장, 호텔 같은 욕실, 아치 형태의 문, 폭신한 소파, 벽난로 콘솔 같은 게 있을 법한 집 말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의 것만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심지어 체리색 마룻바닥과 몰딩도 그대로 둘 생각이다. 리모델링을 진행할 공간과 시공하고 싶은 자재까지 명확해서 기획력 있는 업체보다는 요구사항을 무난하게 시공해 주면서 연락이 재깍 되는 업체와 진행하고 싶은데, 과연 그런 곳이 있을까.
상담을 맡은 실장이 예상보다 어렸다. 엄마의 계산법(실제 나이에서 17살을 빼야 요즘 나이라는 신박한 계산법)을 철석같이 믿고 제 나이에서 10살을 빼고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제로 눈앞에 그 나이의 인간을 마주하자 나의 호언장담이 얼마나 허황되고 주책스러운지를 깨달았다.
회사에서 한참 일이 재밌고 자신감이 솟아났던 시기. 외모적으로는 가장 빛났던 시기. 그가 말해주는 인테리어 정보들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었지만 모르는 척 경청하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40분의 상담을 마치고 돌아서는 입맛이 쓰다. 모든 것을 뜯어고치지 않으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그래 나도 한때는 다 뜯고 고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고 그 빛나는 청춘을 부러워하며 집에 와서 달디달고 달디단 대추정과를 먹었다. 별안간 싸대기를 맞은 기분이다. 대추의 신경안정 효과를 기대해 본다.
인간이란, 아니 나란 인간이란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으면 또 다른 집착거리를 만들어 내는 모양이다. 뜬금없이 펌을 하고 커다란 여드름에 마음이 덜컹했던 건 이번 집착의 상대가 다름 아닌 ‘젊음’이었다는 걸 말해주었다.
이혼과 젊음 사이의 상관관계는 없어 보이지만 헤어지고 나서 보란 듯이 독하게 살을 빼는 욕구 같은 게 내게도 있다. 늙어 보이기 싫다. 그 욕구를 부정하지 않지만 이런 뒤숭숭한 기분이 든다면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욕망하되 집착하지는 말자. 객관적으로 볼 때(물론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다) 나는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다. 그냥 내 나이대로 보인다.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실은 혼자 사는 여자가 기대수명이 길고 더 젊어 보인다는 통계를 보았고 그것을 살짝 기대하고 있긴 하다. 그냥, 딱 그 정도만 하자. 적당히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