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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을 뜯어먹다 말고 궁지에 몰린 쥐가 되어

눈물대신 땀이 많이 났다.

by 윤비

기다렸던 연락은 결국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나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만드는 건 내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노선을 바꿔서 기다리지 않으면 그것이 내게 올지도 모른다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간절하지 않은 척을 해보는 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 기다리는 일만 해온 사람처럼 자신이 또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럴 때면,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정말로 안 되려나 싶어서. 정말로 안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좁디좁은 원룸에 머무르는 것은 남은 계약 기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혹시나 싶은 미련 때문인 것이다. 나는 당해보지 않으면 끝내 모르고 매번 당하기를 선택한다. 후회를 덜 남기는 대신에 시간을 축내는 방법으로 한마디로 결단력이 없다는 말이다.


출근 시간에 맞춰 번쩍 떠지던 눈은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오래 누워있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보낸 반찬과 두툼한 스테이크용 한우 채끝살을 외면하고 식빵에 딸기잼과 그릭요거트를 듬뿍 발라 수시로 먹고 있다. 지금을 제대로 축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식빵을 뜯어먹다 말고 궁지에 몰린 쥐가 되어 나는 되는대로 막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어차피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 그날 기분 따라가고 싶은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막살고 싶은 생쥐가 가고 싶은 곳은 국립현대미술관, 동네도서관, 경복궁, 타코 음식점 같은 곳이다. 문득문득 매일 울었던 제주여행이 떠올랐고 지금은 눈물 대신 땀이 많이 났다.


KakaoTalk_20250918_234130700_04.jpg 바닥 -서도호


저 사람들 속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그냥 다 같이 유리에 깔려버리고 싶기도 하고 몰래 팔을 내리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이우환 작가의 선으로부터 앞에서도 한참을 머물렀다. C의 말이 맞았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너는 정말 극단적이구나’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가 뚱뚱한 남자가 나아? 아니면 마른 남자가 나아?라는 질문을 해버린 탓이다. 나는 이성으로서의 남자에겐 전혀 관심이 없으므로 ‘남자가 뚱뚱하든 말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죠? 남자는 다 싫은걸요?’라는 대답을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내 인생에 ‘적당히’라는 옵션은 없는 모양으로 인생이 성격대로 흘러간다는 말은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경주의 밤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일부러 밤에 들린 경복궁에서는 나도 모르게 무섭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무서웠다. 창덕궁으로 갈 수밖에 없었겠다. 창덕궁의 밤은 괜찮을까. 가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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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 타코와 과카몰리를 곁들인 나초는 맛있었지만, 반도 먹지 못했다. 남은 음식을 포장해서 근처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했다. ‘어린이대공원’이라 이름 붙은 장소는 쓸쓸한 기분을 들게 한다. 선명한 것들은 빛에 바랬고 웃었던 것들은 귀퉁이 하나가 허물어지거나 떨어져 나가 웃는 건지 겁주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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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원은 아무래도 막 지은 곳보다는 낡아서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쪽이 더 아름답다. 이런 곳을 만나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린다. 식물원을 빠져나오자 어디선가 익숙하고 불쾌한 냄새가 났다. 84년생 캄순이. 캄보디아에서 온 캄순이는 귀퉁이 하나가 떨어져 나간 표정으로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나는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동물을 관람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전시된 동물들을 관람하고 동정심을 느낀 것만으로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비겁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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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한 타코를 먹을 요량으로 집 앞 공원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나는 이 공원에 홀라당 넘어간 것 같다. 최근에 고소향 너트향이 풍겨오는 냄새를 맡고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방식으로 가을을 맞이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곳이 좋았다.


그간 가장 좋았던 경험을 꼽자면 농담을 일절 하지 않는다는 옥 선생님이 나이를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않는 나에게 25살 아니냐는 농담을 했던 때이고 막내가 내 나이를 알아내고(그런데 도대체 내 나이를 왜 궁금해하는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30대 초반인지 알았다고 말했을 때이다. 나는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젊어 보인다고 하면 헤벌쭉 좋아죽는다.


개들 사이에서도 늙은 개는 어린 개들의 공격을 받는다. 늙었다는 것은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의 불안함은 주로 여기에서 증폭되므로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헥헥.


그렇다면 의외로 나의 불안증은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부터 나는 32살. 아, 눈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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