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먹여 살리는 일
사람은 까불면 안 된다. 아니, 적어도 나는 까불면 안 된다. 비로소 어딘가에 도착한 기분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주일 전에는 징검다리 위에 잠시 머물렀던 것뿐이고 죽을 때까지 다음의 징검다리를 끊임없이 건너야 하는 것이 나의 인생인 건가.
주말에는 도서관을 가고 헬스장을 등록하려고 했지만,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전날 밤에 냉장고 속 식자재들을 외면하고 엽떡을 시켜 먹어서 속은 부대끼고 얼굴은 띵띵 부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피곤이 물밀 듯이 들이닥친다. 작은 집은 조금만 치우지 않아도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우울한 마음도 조금씩 치우지 않으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그동안 나는 생각보다 순진하고 생각보다 사람들이 못돼먹었다는 새로운 정보를 습득했다. A가 자리를 비우면 A의 험담을 하고, B가 자리를 비우면 B의 험담을 해서 도무지 대화에 낄 수가 없다. 욕을 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는 대화만이 오간다.
입도 벙끗하지 않다가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이 근처에 꽃집이 많은가 봐요?’라고 물었다가 ‘떡집? 그래 C는 왜 L한테 떡집에 가서 자기 답례품을 받아오라는 거야? 미친 거야?’에서 시작된 대화는 결국 C의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모두 샅샅이 파묘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왜 꽃집이 떡집이 되었나? 물론 나의 발음이 좋지 않아 꽃이 떡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P는 ‘너 배고파?’라고 물었을 때 ‘네 배고파요’라고 말해도, ‘미쳤나 봐, 너 왜 저녁 시간인데 배가 안 고픈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P는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배고프지 않아야 저녁 식대가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P는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만, 무시하고 자기 의도대로 흘러가길 바라면서 그의 생각을 왜곡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첨엔, 눈치 없이 ‘뭐 먹을래?’라고 물었을 때 ‘네! 좋아요!’라고 대답했었다. 아무리 뭘 시켜 먹자고 말해도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몰랐다. L은 아직도 잘 모르는지 오늘도 햄버거 먹자는 말에 낚여서 좋다고 말했다가 시무룩하게 점심때 먹다 남긴 누룽지를 먹게 되었다.
문제는 P가 진심으로 직원들을 챙겨줄 때도 많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의 행동 패턴이 일정치 않다는 것은 수시로 바뀌는 그의 감정변화를 읽어야 한다는 뜻인데 매번 에너지 소모가 크다. 쉽게 말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단 말이다. 미친이 처럼 소리를 지르고 욕하다가 갑자기 온열 방석을 들고 와서 자리에 깔아주고 가는 식이기 때문에.
그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두루 갖춘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즉흥적이며 열정적이나 효율성이 떨어지고 따뜻하고 살갑지만 무례하고 상스러우며 거짓말을 일삼고 아첨하고 회유하며 몰아붙이는 방식을 쓰는 사람.
반면 나라는 사람은 감정적이지 않고 돌발상황에 취약하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대신 열정이 없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만 차갑고 거짓말과 아첨을 못하고 팩트로 들이대는 고지식한 방식을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 달 만에 P는 나를 날릴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잘릴까 봐 불안한 건 아니다. 잘리면 잘리는 대로 또 다른 길이 나타나겠지. 나의 불안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문제는 P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마음이 난장판이 되었다.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는 사람. 굳이 흡수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이상적인 밥벌이의 끈을 놓지 못하는 순진함, 나약함 같은 것 때문에.
나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진절머리 나게 괴롭고 사는 건 소름 끼치게 무섭다. 달랑 나 하나 책임지는 이 일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