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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Dec 17. 2021

당신이 부자가 되고 싶은 진짜 이유

르상티망을 넘어서

너도 내가 좋아할 때나 특별한 거지


우연히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왜 그럴까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문장만큼 갑을관계를 한 번에 전복시키는 문장을 살면서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덜어내고자 브런치에 생각이 흐르는 대로 글을 썼다. 글은 그 사람의 정신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어떠한 구상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쓴 글이었지만 나는 2년 동안 연재해온 글 속에서 하나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의 자기다움이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쥐뿔도 없이 태어난 내가 나답게 살고 싶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야무진 꿈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정말  믿고 나다움을 꿈꿨을까? 생각해보니 너도 내가 좋아할 때나 특별한 거지라는 배짱 덕분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성공의 형태는 각자의 이상형의 조건만큼이나 개인의 가치와 취향을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에 정답이 으니깐. 덕분에 나는  삶을   유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누군가에겐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안정된 부가 성공의 기준이  것이고  누군가에겐  이름 석자가 명함이 되는 명성이  것이고,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가족과의 화목한 삶이  것이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에 전부를 얻을 수는 없으니 적어도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평가의 기준이 아니던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가장 좋은 점은 부가 증가할수록 유용성을 따지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평생을 가성비로 살아온 내가 절대 넘어설 수 없던 그 지점이 바로 유용성을 대신해 세련됨과 우아함을 선택할 수 있는 초연함이었다(도리스 메르틴). 누군가 그랬다. 물건을 살 때 가격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으면 부자라고. 하지만 나의 욕망이란 녀석은 늘 시간차 공격을 하는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영화 제목처럼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나의 결핍을 바탕으로 효용가치를 변화시켰다. 우리의 욕망은 실패한 첫사랑처럼 가질 수 없을 때 극에 달한다. 그리고 그걸 좀 더 미화하거나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부자들의 과시적 소비는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함으로써
지위를 상징화하여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부가 곧 지위며 권력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 획득한 부인 지를 떠나
부도덕한 부자들을 비난하면서도
부를 소유하고 과시하는 행위 자체를
동경하는 이중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들의 악행을
모방하거나 방임하며 살아간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120년 전 베블런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우리 삶의 외형은 시간에 따라 달라져도 인간을 움직이는 욕망의 형태는 변하지 않은 듯하다. 우리의 뇌는 정직하니깐. 과장된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기저에 깔고 있는 강한 자극에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리 인간 역시 도파민의 분비를 의지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깐.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가 '너도 내가 좋아할 때나 특별한 거지'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비록 절대 빈곤의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나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의 욕망 뒤에 숨은 결핍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적 심리적 자본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보통 자본이라고 하면 경제적인 부분에서 돈을 생각하지만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자본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책 아비투스의 작가 도리스 메르틴은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에는 심리자본, 문화자본, 경제자본, 지식자본, 신체자본, 언어자본, 사회자본이 있다고 설명했다.


아비투스는 habit(습관)+us(우리)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사회화 과정을 걸치는 동안에 개인이 획득하는 하나의 성향 계체이다. 우리의 행동방식, 습관, 취향, 가치관 등은 아비투스에 의해 발현된다.




철학이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르상티망 씨... 제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돈이 없어 서러운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돈으로 갑질 하는 사람을 한 번쯤은 만나봤을 것이다. 어쩌면 부자를 꿈꾸는 우리의 욕망 가장 밑바탕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존중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입었던 옷을 반품하겠다고 내 얼굴에 스웨터를 던진 백화점 MVG 고객의 몰상식함을, 소비자의 잘못임을 알면서도 왜 융통성 없이 행동하냐며 나에게 사과를 종용하던 백화점의 플로어 매니저의 무책임함까지도. 세상은 언제나 돈 많은 강자 편임을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겐 눈에 보이는 세상이 하나의 진실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보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양자로 구성된 우리의 세상은 대부분이 비어있고, 당신이 두개골 속의 뇌라고 가정해보면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청각와 같은 감각자극 모두는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전기적 신호일뿐이다. 실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뇌가 감각정보를 재구성함으로써 가상으로 구현한 시뮬레이션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정보의 변화 없이 우리가 어떻게 예측을 하는가에 따라서도 우리의 뇌는 결과를 다르게 해석한다는 미국 서섹스대학교 컴퓨터 신경과학 교수 아닐 세스의 강의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뇌는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 신호보다 반대 방향인 인지 예측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아닐 세스)


 사람이 만나 30분만 이야기를 해도 계급이 생긴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의식 자체를 부정할  을 것이다. 그럼에도 니체가 말한 약자가 강자에게 가지는 원한감정인 르상티망을 넘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주어진 정보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구현하지 못한 ,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낡은 그래픽카드일지도 르니깐.



사람은 본디 부족한 존재다.
부자이거나 권력자라고 예외일리 없다.
가난한 사란들은 정도가 더 심할 테고
부자들 역시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산다.
어쩌면 결핍은 우리네 삶의 원형일지도 모를 일이다.
결핍을 대하는 태도에서 삶이 갈린다.
어떤 사람은 결핍으로 인해 좌절하지만
어떤 서람은 결핍을 경쟁력으로 승화시킨다.

-최준영 결핍의 힘-







가난한 자의 나다움의 여정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그동안 내가 마주한 생의 결핍의 순간들을 써 내려가 볼 생각이다. 대단한 학자도 성공한 사람도 아닌 보통사람이 쓴 글에 어떤 울림과 유용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지도 모르니 용기를 가지고 긴 여정을 시작해볼까 한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인 다니엘은 사회적 약자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위해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힘든 순간에도 이웃들에게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인간미를 잃지 않았다.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며 또한 부당함에 저항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지금 우리의 자리가 어디에 위치하든, 우리는 의지의 힘으로 품위를 지키며 존재할 수 있음을 배웠다.


이 영화가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공감하는 약자의 삶이나 시스템의 모순을 그린 서사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노력한 다니엘의 뚝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되지 않는 행위를 낭비라고 생각하는 세상이다. 베블런의 이론대로라면 역설적이게도 우리 삶의 가장 큰 플렉스는 부자가 되지 않는 곳에 시간과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다움은 우리가 삶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과시적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좀 더 다양한 가치관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나의 결핍을 마주해볼까 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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