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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Feb 07. 2022

당신의 자기 계발이 실패하는 이유

자기 계발 중독자의 고백


나는야 인포스터


과거 나는 평균적인 삶에 대해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삶이 힘들어질수록 나에게 주어진 조건과 삶의 난이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중윗값에 수렴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필요했던 순간이다. 아버지로부터 밥 먹듯 가진 것도 없는 것이 눈만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로선 나의 인생에 있어 꿈에 대한 정당한 기준과 목표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나는 꿈에 대해서도 스스로 검열을 해야 했다. 불안한 내 삶을 붙잡기 위해 새벽 기상부터 운동, 독서, 영어 공부 등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에 대해서 무던히 애를 썼다. 그리고 좌절했다. 책을 100권만 읽으면 달라진다는 삶이, 운동을 66일만 해도 달라진다는 삶이, 아침에 일어나 이불 정리만 해도 달라진다는 삶이... 왜 그 모든 걸 하고 있는 나에게선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2021년 알라딘이 분석한 나의 독서 기록




전업주부가 된 후 나는 도처에 널린 우울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조약한 나의 자의식의 대부분은 학교에서의 성적이나 회사의 이름과 같은 외부의 평가로 채워졌는데 그것들이 빠져나간 내 삶은 골다공증에 걸린 허약한 뼈와 같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작은 외부 충격인 타인의 평가에도 잘 부서졌다. 내게도 딛고 서서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광장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건 자의식 과잉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수치심과 자기 계발


중학생이 될 무렵 13평 주공아파트에 살았던 나는 우리 집 주소에 '주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창피해졌다. 요즘에도 존재하는 휴거니 엘사니 빌라충이니 하는 도시 괴담에서도 알 수 있듯 30년 전에도 집은 상당히 비중이 높은 서열의 상징적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마흔이 넘은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학교에선 학년 초만 되면 호구조사를 실시하는데 부모님의 나이와 직업, 이혼 여부를 비롯해 우리 집이 전세인지 자가인지, 부모님의 학력이 어떻게 되는지, 승용차가 있는지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거수를 통해 공개적으로 요구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가난이 연좌제라는 걸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더욱 슬픈 것은 현실에서 버젓이 존재하는 차별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내가 경험한 가난에 대해 떳떳해하지 못한 채 수치심을 느낀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당연하겠지만 성인의 삶 속에서도 내가 아닌 배경으로 평가받는 일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결과 나의 무의식엔 수치심과 더불어 억울함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체면 유지에 필수적 요인건들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고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 계급론 p.244-




나는 비루한 나의 배경이 아닌 오롯이 나로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공부를 잘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날씬하고 멋진 외모를 소유하면,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면, 어려운 책을 술술 읽어내면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인 나의 배경에 대한 열등감과 수치심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런 악착같은 나의 노력이 계급 피라미드 저 끝에 놓인 나의 현실을 더욱 생생히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엔 고등학교 때까진 좋은 성적과 원만한 교우관계로 배경의 열약함을 긍정적으로 상쇄했다. 하지만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지방대학, 그것도 패션디자인과를 선택하면서 자본주의 계급 피라미드 속에서 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20년 전 나는 크레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와 같은 패션 브랜드의 수장이 되고 싶었다. 불행히도 지방대 패션디자인과라는 프레임의 한계를 뛰어넘기엔 나의 실력엔 빈 틈이 많았다. 어정쩡한 재능이 불행의 씨앗이라고 했던가.




만약 나의 꿈이 의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는 것처럼 사회의 인정을 받는 삶을 목표로 했다면, 그것도 아니면 돈을 많이 버는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면 인정 욕구로 인한 내적 갈등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한다. 학창 시절 1~2등급을 유지했던 성적임에도 지방대 패션디자인과를 이력서에 적는 순간,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12년 간의 성실함이 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학벌은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프리패스와 같았고 학벌 카르텔은 여전히 건재했다.


배움과 성장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내가 믿을 거라곤 나 자신밖에 없었기에 과거 나에겐 배움의 시간을 인내할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또한 남들의 것은 대단하고 거창해 보였지만 막상 내가 노력해서 그걸 이루고 나면 그 순간 그것들의 가치는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원하는 곳으로 오르기 위한 발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남들의 발 밑에선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발판이 내겐 모레성과 같아 아무리 밟고 오르려 해도 나의 발은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디렉팅란 일종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에 있어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단단한 내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문서나 데이터로 표현되는 명시적 지식을 넘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자신만의 암묵적 지식을 무기로 자기 방향으로 나아가는 힘과 더불어 자신만의 미학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내가 실패했던 이유는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도 원하는 스펙을 가지게 되어도 빈곤한 마음의 상태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우리가 흔히 아는 자기 계발로는 자기 확신의 에너지를 채울 수 없었고 더불어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수치심을 지울 수도 없었다.




수치심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또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 밀려오는 감정이다. 수치심에 관한 카르스텐 스타게 박사의 저서에 따르면 수치심은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보이지 않게 한다는 뜻에서 숨기다는 표현과 관련이 있다. 이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수치심인지를 판단하는 데 유용한 단서가 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은 절박한 기분이 든다면 아마도 수치심이 맞을 것이다.

일자 샌드_ 나의 수치심에게 p.18



수치심의 극복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 중 하나는 수치심이라고 한다. 수치심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의 감정인 죄의식과 달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타인을 인식할 때 느끼며 자신의 존재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왜 나는 가난이 부끄러웠을까? 왜 우리 사회는 가난을 혐오하게 되었을까?


가난의 실체는 구멍 난 양말 그 자체가 아니라 구명 난 양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나 역시 가난으로 인한 물리적 불편보다 내게서 가난이 표시가 나지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마음이 나의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나의 가난을 숨기기 위해 꽤 많은 양의 심리적 에너지를 낭비했었다. 


가난의 경험은 납으로 만든 잠수부의 추처럼 수치심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제 이 무거운 추와 작별을 할 순간이 왔다. 나의 가난은 성장 과정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을 하나의 변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시작점이 어디든 지금보다 나아지면 되니깐.


부자가 되는 것과 부자로 보이고 싶은 것이 다른 문제인 것처럼 스스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하는 것과 그럴싸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하는 것 역시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나는 진짜 내게 필요한 자기 계발이 아니라 취약한 자기 확신을 대신해 내가 이만큼 능력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한 것은 아닐까 한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사회적 계층과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대해선 무감각하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은밀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수치심은 우리의 무의식 저변에서 다양한 문제를 이르키기때문에 잘 다룰 필요가 있다. 사회적 존재인 내가 사회의 규범과 시스템을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 번뿐인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텐슨, 하바드 인생학 특강



사회에서 제법 믿을만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지표에는 2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가난을 혐오하는 시대에서 중상층의 자녀로 구김 없이  자랐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주소이고  다른 하나는 성실히 좋은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학벌이라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의 인정투쟁은  모두를 소유하지 못한 나의 자격지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차고 넘치는 자기 계발의 동기가 아니라 올바른 자기 계발의 방향이 아닐까 한다. 비록 책을 100 이상을 읽어도, 운동을 66 이상을 해도, 아침에 이불 정리해도 단번에 달라지지 않는 나의 인생이지만 나의 결핍과 취약함을 인정하며 돌보는 동안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할  있을 테니깐. 나는 과정의 힘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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