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프로이직러의 고백
초민감자,HSP(highly sensitive person)
직업적 자아가 나의 자아 지분 90% 이상을 차지했던 시절, 나는 그럴싸한 직업을 소유하면 잘 먹고 잘 살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직장인 월급으로 삶은 달라지지 않았고 또한 행복과 직업의 상관관계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아주 가끔 처음 보는 사람이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게 나를 소개할 수 있다는 장점만 빼곤 삶은 흔들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나를 갈아 넣어 얻은 것이 고작 이건가라고 후회가 될 만큼 결과는 초라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초민감자, HSP(highly sensitive person)이라면 어떤 직업이 되었든, 획득하기보다 유지하기가 더 어려웠다에 내 전 재산을 배팅하겠다.
넌 경단녀고, 난 과장이야.
얼마 전 인사담당자인 남편은 열심히 쓰고 있던 내 이력서를 보더니 본인이라면 나를 뽑지 않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평소 나에게 직장에서 너무 성실히 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던 남편이었다. 나의 인사이트와 스토리텔링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본인이 이직할 때마다 나에게 이력서 대필을 부탁하던 남편이었다. 우리가 결혼할 때 본인은 서울로 이직할 능력이 안되니 나에게 부산으로 내려왔으면 좋겠다던 남편이었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의 심정이 이랬을까. 과거 선녀가 아이를 세 명 낳으며 보낸 시간은 현대 경단녀의 육아기간만큼 그녀에게도 치명적인 시간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나의 선녀 옷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의 경우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 중견기업 남성복 디자이너로 시작해 어학연수 및 유명 패션스쿨의 단기코스 후 SPA 브랜드 매장 매니저, 대기업 온라인 MD까지 패션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했다. 반면 남편의 경우 몇 번의 이직은 있었지만 법대를 졸업하고 제조업 기반의 회사에서 쭉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중이다. 회사의 네임밸류만 생각한다면 나의 전직 회사의 규모가 더 크고 화려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나의 경우 1~2년짜리 짧은 경력이라는 점이다. 그래 맞다. 나는 전직 프로이직러다.
잦은 이직은 불성실함의 증거일까
야근은 기본, 주말 시장조사에 여름휴가까지 반납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나였기에 상사의 인정도 받고 진급도 빠른 편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불성실함은 어떤 의미에선 맞고 또 어떤 의미에선 틀릴지도 모르겠다. 변명을 하자면 그것은 각자에게 일의 의미가 다르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력 대비 높은 연봉이나 사회적 직위를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적당히 시간을 보내며 월급이나 받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나는 어떤 의미에서 존경을 표한다. 그리고 정말 부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현실감각이기 때문이다. 다들 그렇게 직장에서 에너지를 아껴 주식이나 부동산 공부를 하고 월급은 레버러지를 위한 이자로 사용하며 40세 전에 파이어족이 되는 것을 꿈꾸는 사회에서 일에 있어 언제나 진심인 나는 삶에 있어 아마추어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도파민을 분비시킬 다른 무언가 필요해진다. 몰입의 과정이 없이 8시간 동안 어떻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직업을 찾는 일은 내게 맞는 배우자를 찾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게 바람을 권하듯 열심히 하는 내게 그래 봤자 남 좋은 일이라고 조언해주는 열정 없는 월급루팡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힘 모아 다 같이 야근을 하고 주말근무를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나를 힘들게 했다.
그렇게 나는 10년 남짓한 사회생활 중에 번아웃을 경험했고 출산과 육아로 경단녀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루저가 되었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반짝이는 명함이 사라진 후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방황을 했다. 회사의 명함은 세상과 상호작용을 위한 나의 유일했던 가면이었기에 그 가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아도 분산 투자하세요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직업적 자아에 힘을 빼기로 했다. 직업이 나의 전부가 될수록 계속 힘이 들어가게 되고 초민감자인 나로서는 번아웃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인생에 있어 직업의 정의를 수정했다.
나에게 일이란 적당한 노력의 대가로 일정한 생활비를 버는 수단이다. 자아는 다른 곳에서 찾고, 돈은 투자로 벌자.
그러므로 꼭 직업이 멋있을 필요도 없고, 나의 능력 최대치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즐겁게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곳이면 된다. 젊은 날의 사랑처럼 열정을 한 번에 쏟는 일보다 인생을 함께 해쳐나갈 안정적인 배우자처럼 서로에게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일이 내 삶을 견고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깐.
난 패션피플이 될 거야.
집 근처 SPA 브랜드에서 직원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아직 엄마의 손이 필요한 아들이 있어 시프트로 일하는 곳(근무시간이 바뀌는 곳)은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시간이 일정한 영어학원이 아닌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할머니가 되어도 나는 패션피플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규모가 있는 매장의 경우 일의 경계가 명확하고 일에 있어서도 규칙이 있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경우가 많으며 인간관계 역시 맡은 일을 잘 해낸다면 일로 다른 사람과 감정을 소모할 일이 적기 때문이다. 초민감자에겐 몸이 힘든 것보다 감정 소모를 줄일 수 있는 환경설정이 롱런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몸은 힘들지만 매장에서 일하는 것은 즐겁다. 바쁜 만큼 모두가 열심히 했고, 주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하다 보면 퇴근할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나의 친절함에 친절함으로 답했고 나의 추천이나 조언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나이 많은 신입인 나에게도 친절했으며 덕분에 인터넷 상에 소문이 무성했던 텃새는 경험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42살에 다시 신입사원이 되었다.
멋진 직함이 없어도 삶은 여전히 빛이 날 수 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삶이야 말로 진짜 나를 위한 삶일 테니깐. 나는 민감성을 잘 다루는 법을 익힐 때까지 힘을 빼고 유형을 하며 생존에 집중할 것이다. 번아웃이 되어 시장에서 사라지기보단 덜 유능해지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살아남는다면 분명 기회는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은 초민감자라면 무엇보다 생존에 집중하자. 당신이 성공하지 못 한 이유는 당신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외부 자극에 대한 과부화된 피로감 때문일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