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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야채 Apr 15. 2024

연상호 감독의 <기생수 : 더 그레이>를 봤습니다.

독특한 시선과 해석, 그리고 충실한 클리셰

연상호만의 컬러가 있습니다. 

예쁘게 담거나 과장하지 않고 그냥 뚝 가래떡 썰듯이 보여주는 것.


그러면서도 극적인 상황에선 최대치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

여기서 호불호가 갈리는 듯 한데 저는 완전 좋습니다.

K-드라마만의 필터가 없는 느낌이랄까. 


연상호 감독님에서 좀더 거칠어지면 찰스 부코스키 감성의 하드보일드가 나올텐데

그래도 나홍진 감독님 같은 사포는 아닌 것 같고

분명 좀더 말랑말랑한 시선이 존재합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연 감독님 너무 열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옥>, <선산>에 이어 <기생수 : 더 그레이> 까지.

제작 타이밍으로 봐서 미리 비축해두신 대본들이 상당히 많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족은 그만두겠습니다.


<기생수 : 더 그레이> 스포일러를 포함해 리뷰를 써봤습니다.

이 드라마는 특이한데 그러면서도 충실히 클리셰를 따르고 있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넷플릭스 글로벌 반응이 아주 좋구요. 


꼭 해체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안보신 분들은 이어지는 리뷰를 읽을지 말지 잠시 생각해주세요.


아빠에겐 가정폭력을 당하고 엄마에겐 버려진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름은 ‘수인’.


마트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수인은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다.

그런 수인이 마트에서 일하던 중 조현병 질환을 앓는 한 손님과 시비가 붙는다.

앙심을 품고 수인의 퇴근길을 따라붙는 남자. 


인적이 드문 길에서 칼을 휘두르고, 수인은 쓰러진다. 그때 우연처럼, 기적처럼 기생포자가 하늘에서 떨어져 수인의 몸 안에 기어들어간다.


기생수는 죽어가는 수인의 몸을 회복하는데 에너지를 쓰고, 자신의 본능이자 목표인 ‘인간의 머리 점령’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다른 기생수들과 달리 수인의 기생수는 이름도 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따온 ‘하이디’다.


수인이 죽으면 하이디도 죽으므로, 수인의 몸 안에서 수인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싸운다. 이것이 <기생수 : 더 그레이> 메인 캐릭터의 주요 설정이다.


1. 히어로 : 인간도, 기생수도 아닌 '변종'의 탄생

사람을 대량으로 죽이게 할 수 있는 살상 무기나 다름없는 하이디의 존재가 수인의 몸 속에 있다는 걸 깨닫고, 수인은 절규한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왜 날 괴물로 만들어버린거야!”


'하이디'는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지만 선과 악으로 완벽히 대비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와는 다른 점이 있다.


수인과 하이디는 방식만 다를 뿐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수인은 기생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그런 그녀가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이디가 짠 하고 나타나 싸우는 식이다.

하이디는 반쪽밖에 수인의 몸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싸운다.

그래서 사람의 몸에 있다가 다른 몸을 옮겨타면 그만인 다른 기생수보다 더 강한 힘을 휘두른다.


인간 사회 가장 약한 존재인 '수인'이,

박멸돼야만 하는 존재인 '기생수'와 만나

'변종'이 되고, 이 '변종'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낸다는 설정이다.


기생수에 반쯤 몸이 잠식당한 인간은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지만,

그런 변종과 변형이 오히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메시지다.


거미에 물린 스파이더맨이 영웅의 초능력을 갖게 된다는 설정과 유사하다.

불행의 사건을 전환해 행운으로 바꾸는 것.

히어로물에 반드시 등장하는 공식이다.


2. 빌런의 목표 : 인간 사회 지도자

기생수의 목표는 ‘인간의 머리’다.

그냥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 점점 더 큰 권력을 지닌 ‘지도자’로 갈아타려 한다.


처음엔 클럽의 남자로 시작해, 지역 교회의 목사의 머리로 들어간 기생수.

‘기생수’에 잠식된 인간들을 모아 집단을 만들고,

계획을 세워 정치 지도자의 머리를 노린다.

이 와중에 완전 인간이면서 ‘기생수’ 집단을 추종하는 이도 생겨난다. 


여기서 연상호 감독님만의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이기도 하다.


<기생수> 원작에서는 평범한 남자 주인공이 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스토리들을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연상호 감독님의 <기생수 : 더 그레이>에선 종교지도자& 정치인 vs 그걸 막으려는 경찰집단과 수인 이 스토리의 주를 이룬다.


<지옥>에 이어서 종교, 지역의 권력자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의도가 아닐까.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만큼 사회에서 ‘지도자’가 미치는 영향력과 힘은 막강하기 때문이다.


기생수가 지구에 착륙하자마자 간파했듯,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인류를 멸망하게 할 수도 있다.

연 감독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듯 하다. 물론 권력자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학교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보단 훨씬 스토리에 극성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효과도 있다.


3. 히어로와 빌런 사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 선택


연상호 감독은 이 구도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이 질문을 가장 잘 드러냈던 캐릭터는 바로 이정현 배우가 연기한 그레이팀의 리더 준경이다. 

준경은 그레이팀을 이끄는 리더다. 기생충이라는 벌레가 인간의 뇌를 잠식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도 가장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는 인물이다. 위급상황 앞에서 쓸데없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며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한마디로 흠잡을 데 없이 스마트하고 명민한 캐릭터였다. 


기생수를 소탕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진 그녀는 계속해서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바로 그녀가 이끄는 그레이팀 내부에 기생수를 추종하는 경찰(김인권 배우)이 있다는 신고 때문. 뿐만 아니라 기생수에 잠식된 경찰이 경찰(권해효 배우) 행세를 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듣는다. 

이 모든 정보는 기생수에 먹힌 것이 100% 확실한 수인이 제공한 것이다. 


단순하게 ‘니편’vs ‘내편’으로 나눠 생각했을 때 ‘내편’에 있는 사람이 사실은 위장자이고, 반대편 진영에 있는 사람이 ‘내편’이라는 얘기다. 과연 설득당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 준경은 마지막까지 수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수인을 죽이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후배 경찰 원석이 기생수에 잠식된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바로 총구를 바꾼다. 


결국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약 준경이 편가르기를 하면서 수인의 이야기를 아예 듣지 않았다면 수인은 죽었고, 인류는 기생수에게 잠식당했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목숨 걸고 악과 싸울 히어로도, 이 세상을 집어삼키겠다는 욕망으로 대학살을 벌이는 빌런도 아니라면, 최소한 선택이라도 잘 내려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전형적인 캐릭터이자 갈등이다. 예를 들면 영화 <추격자>에서 슈퍼 아줌마는 하정우에게 서영희가 숨어있는 위치를 말하면서 서영희를 죽게 만든다. 영화 <곡성>에서 곽도원 배우는 황정민과 천우희 사이에서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 끝까지 갈등한다. 이들이 빌런과 히어로/또는 선과 악 사이에서 내면적 갈등을 겪는 것. 전형적인 공식이다.)


4. 감독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드라마에서 ‘조직’ 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온다.


기생수로서, 조직을 배신한 기생수 우두머리를 처단하기 위해 수인을 돕겠다고 찾아온 설강우의 누나 설경희. (개인적으로 이 캐릭터가 제일 흔들린 것 아닌가 싶었는데...한번 더 꼬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경희는 식물원에서 수인과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며 이렇게 말한다.


“조직이란 건 정말 대단해. 하나의 개체는 약할지 모르지만, 그 개체들이 모인 조직은 엄청난 생명력과 힘을 발휘하지.”


뿐만 아니라 모든 소동이 끝난 후 수인과 강우의 대화에서도 '조직'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강우는 조직에 들어가고 수인은 하던 아르바이트를 계속 한다.


“나는 새로운 조직에 들어갔지.”


“그렇게 당하고도 또 조직에 들어갔다고?”


“내가 뭐 조직을 차릴 수는 없잖아. 언제까지 독고다이로 살 수도 없고.

응?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아요. 멋있지 더 그레이 팀 설강우? 

이 옷도 다, 싹 다 최준경 팀장이 해준거야. 4대 보험도 되고.

그래도 어떡하냐? 한 번 더 믿어 봐야지.”


강우의 선택처럼, 우리는 배신을 당해도 또 한번 더 사람을 믿어보고, 

또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하이디는 수인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바다를 바라보는 수인의 눈빛에 따뜻한 온기가 담긴다.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이야기로 엔딩을 맡는 셈이다.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 고독과 고난, 재수없게 타고난 운명 등등…

이 모든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이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모든 시청자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5. 사족 : 개인적으로 가장 불쌍한 캐릭터

강우의 친구 기석이 등장하는데,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기석을 비실하고 몸 안좋은 친구로 기억하던 강우가 기석의 집에 숨어들어가 그의 몸짱 사진을 보면서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정도면 오랜기간 얼굴도 안보고 안친했을텐데?! 오갈데 없는 강우에게 집 비밀번호 알려줘, 200만원 빌려줘, 차도 빌려줘...심지어 마지막에 경희에게 죽임 당함...ㅠ완전 몸짱인데 기생수에게 갈리는 것 보고 안타까웠음. 좀 대치 가능한 액션씬 같은건 가당치 않았으려나!? 


하여튼 이렇게 친구와 친동생 살해한 경희인데 강우가 너무 쉽게 손잡아서 그게 좀 아쉬웠다. 복수극을 써봤어서 그런가 이 정도 관계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복수 각인데...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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