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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Jan 23. 2024

너와 나를 가르는 사회 속, 어린이의 위치는?

출장길에 동행한 6세 어린이 덕분에 뉴욕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어린이와 함께 다니니 그들을 챙겨주는 기본 문화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은 식당과 대중교통이었다. 미리 준비된 색칠공부 종이와 색연필, 다양한 어린이 메뉴가 그랬다. 대중교통 역시 그랬다. 그곳엔 어린이를 위해 준비된 시설은 없었으나 어린이에게 마음을 써줄 시민들이 있었다. 물론 내가 만난 뉴욕이 뉴욕의 모든 면을 보여주진 않았을 것이다. 헬스키친과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차이처럼 그곳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러니 배려 넘치는 사람이 있고 예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지금의 한국처럼 어린이를 향한 혐오가 기본세팅 되어 있진 않았다.



한국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데 무조건 중간에 맞추기를 강요한다. 뮤지컬을 보러 가서 시체처럼 봐야 한다는 기사를 보고 정말 놀랐다. 내가 비싼 돈 주고 공연을 보니까 방해하지 마!라는 문화는 어디에서 온 걸까. 브로드웨이에서는 뮤지컬을 매우 자유롭게 본다. 그렇다고 표가 싸냐? 절대 아니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도 한국만큼 비싸다. 그렇다 하더라도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시체처럼 앉아 있지 않는다. 오히려 춤을 추며 같이 즐기는 사람이 많다. 공연도중에 화장실도 매우 자유롭게 간다. 누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은연중에 기본세팅한 문화에 맞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아이를 데리고 뮤지컬을 보다가 화장실에 다녀오면 어떻게 될까. 어린이 뮤지컬이 아니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듯 숨조차 쉴 수 없는 기본 세팅 그 사이에서 괜히 어린이만 피해를 보고 있다. 문제는 어린이에 대한 혐오가 어린이가 싫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혐오의 면면을 잘 살펴보면 양육자의 행동이 싫어서 그것을 어린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아과 오픈런은 브런치를 즐기기 위한 엄마들 때문이다’ 라거나 커피숍에서 아이에게 공짜 우유 마시게 하는 방법이 맘카페에 올라가 있어서 문제라거나 이런 소식이 호들갑스럽게 뉴스 기사를 장식한다. 일부 사람들의 문제를 마치 양육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미디어가 나팔을 불어 대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더더욱 양육자를 욕한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현실에서 발생하는 것 마냥 서술하는 점도 문제다. 나는 브런치를 먹기 위해 소아과에 오픈런하는 엄마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신생아를 안고 소아과에서 3시간 대기하며 수유 시간이 다가옴을 걱정했는 내 모습, 어플로 영유아 검진을 잡기 위해 6개월간 클릭하다 실패했는데 맘카페에서 영유아검진 예약을 취소하려는데 지금 예약하실 분이 있나요라는 글을 보고 환호에 찼던 모습만 떠오른다.     


이 글을 연재하며 프롤로그에 이런 말을 썼다. 부디 악플이 달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이다. 다행히 악플은 달리지 않았지만, 또다시 확증편향이 가득한 댓글을 만나게 됐다. 공동체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는데 내가 피해를 보기 싫으니 더 열심히 가르자는 글 말이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불특정다수를 만나는 곳에서는 무조건 내가 편할 수 없다. 그것이 공공이라는 것인데 그 기본부터 무시하려고 하니 서로의 생각이 다른 방향을 향해 튀어버린다. ‘나약하고 구멍 많은 인간이라서 잠시라도 성찰을 멈추고 휩쓸려 살다 보면 짓는지도 모르고 죄를 짓는다’는 은유의 말처럼* 우리 모두 성찰을 멈춘 것일까.     


신나게 글을 연재하다가 막내의 어린이집 방학이 왔다. 온종일 돌이 안된 아이와 있다 보니 글 쓰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초등학교 방학도 그다음 주에 곧이어 왔다. 첫째의 방학 스케줄을 완성해서 학교에 안 가도 공백이 없도록 꾸려줬다. 그리곤 둘째의 유치원 졸업을 맞이했다.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졸업과 동시에 입학을 준비하며 방학 돌봄에 투입했다. 벽 한가득 아이들의 방학 일정표가 붙는 동안 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언어를 잊어버린 지 몇 주가 지나고 조금의 여유가 생겨 드디어 연재 글의 에필로그를 쓰게 됐다.


양육자들은 육아에 정신이 팔려서 이렇게 자신만의 언어를 잊고 산다. 그런 사람들이 어느 순간 벌레가 되어 박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말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존재 자체마저 숨겨야 하는 순간이 왔다. 내가 밖에 나가서 벌레처럼 행동하는 건 아닌지 계속해서 검열하게 됐다. 벌레가 되지 않아야 해. 나는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줘선 안 돼. 그렇게 숨 막히는 감옥생활을 하다가 뉴욕에 가니 숨이 트였다. 아, 내가 나를 검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도 있구나 하고 말이다. 도쿄에 가서도 그랬다. 소바집에서 아이와 밥을 먹는데 옆 테이블에 있던 일본인 아기가 테이블에 올라갔다 다시 앉았다가 테이블 아래로 들어갔다 나왔다 정신이 없다. 그리곤 어느 순간 제자리에 앉아서 짧은 동요를 불렀다. 잘한다고 가족들이 손뼉을 쳐준다. 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일본도 식당에서는 아이가 동요를 불러도 되는구나. 도쿄 역시 뉴욕처럼 어린이 메뉴가 잘 준비돼 있다. 소바집마저 어린이 메뉴가 있어서 먹을 수 있다. 한국은 글쎄... 앞에도 썼지만 어린이 메뉴가 거의 없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건 한국 양육자들이 나빠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총선 준비로 연일 정치 기사가 뉴스를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 저출산과 관련한 이슈가 죽어있다. 국민의 힘에서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영입한 것. 더불어민주당에서 아이를 낳으면 임대 아파트를 제공하겠다는 것 정도가 보이긴 하는데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빼놓은 채 아~ 이 정도 하면 마음이 좀 달래지려나요? 같은 느낌만 든다. 이 혐오의 전쟁은 아무래도 오래갈듯싶어 또 한숨이 나온다.   

   

그 사이 우리는 더더욱 우리를 가르고 갈라서 넘어오지 못하도록 혐오를 발산하진 않을지 우려가 된다. 우리 사회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 은유. 2024. 《해방의 밤》. 서울: 창비. p.163.

**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연재의 마지막 글을 너무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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