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하 May 14. 2024

춘식이 도시락, 그게 뭐라고.

대체공휴일에 둘째가 돌봄 교실에 가게 됐다. 급식이 없는 날이어서 도시락과 간식을 싸 오라는 연락이 왔다. 도시락을 얼마 만에 싸보는 것인지.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김밥을 싸주자니, 내가 김밥을 너무 못 말았다. 정말 정말 못 말았다. 그렇다면 역시 소불고기 도시락인가! 그러나 둘째를 생각해 보니 고기반찬이 그득한 도시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생선을 구워 넣어주기엔 식어서 비릴 것 같고. 나물 반찬 넣었다가 쉬어버리면 어쩌지 싶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선택한 메뉴는 햄 볶음밥! 문제는 볶음밥이 둘째가 기대한 아기자기한 도시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떡하지. 배달앱에 괜히 도시락 검색을 해본다. ‘아, 볶음김치 맛있는데~ 제육볶음이 갑자기 당기네~’하고 어른이 좋아하는 메뉴만 구경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정신 차려! 오늘 재료를 사지 않으면 내일 도시락 망해!라고 외치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아, 진짜 어떡하지.     

기포가득 피카츄, 계란을 체에 걸렀어야했는데!

둘째는 도시락에 많은 기대를 하는 듯했다. 어떤 도시락을 싸줄 건지 여러 번 물어봤기 때문이다. 괜히 캐릭터 도시락을 검색해 본다. 와, 이건 도시락이야 예술이야? 블로그에 예쁜 도시락 후기가 넘쳐난다. 짱구에 산리오에 피카츄까지 아, 이건 너무너무너무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내 손으로 만들 수 없는 영역임을 확인만 했다. 그렇다면 역시 꼼수를 써야지 싶다. 몇 년 전, 둘째가 어린이집 소풍을 갈 때 볶음밥 위에 피카츄 얼굴을 만들어 줬더니 정말 좋아했었다. 밥으로 모양내기를 포기하고 계란 위에 얼굴만 만든다! 이번엔 볶음밥 위에 춘식이! 둘째가 요즘 춘식이에 빠져있으니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햄야채볶음밥을 만들었다. 아이들에게는 버터로 볶아 주고 버터를 못 먹는 남편에게는 식용유 아주 살짝 넣어 볶음밥을 만들어 줬다. 아이도, 남편도 잘 먹는다. 앗싸. 맛이 있나 보군. 가족들이 식사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앉아서 김과 맛살, 치즈를 오렸다. 최선을 다해 오리고 있으니 둘째가 밥을 먹다가 나에게 온다. 엄마 무슨 도시락 만들어줄 거야? 궁금해서 발을 동동 구르길래. 춘식이를 만들 거라고 했다. 둘째의 눈이 반짝인다. 그래서 더 열심히 오렸다. 볶음밥 위에 넓적한 계란을 올리고 춘식이 얼굴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망하면 안 돼, 망하면 안 돼, 망하면 진짜 안돼를 외치며 김에 밥풀을 붙여서 계란에 올리기 시작했다. 둘째가 옆에서 흥분 콩콩 뛴다. 안돼 안돼. 저리 가서 밥 먹고 있어라고 말한 뒤, 겨우겨우 완성을 했다. 밥을 다 먹은 둘째가 춘식이를 보며 좋아한다. 아, 다행이야. 비율도 안 맞고 밥도 다 안가려진 넓적한 춘식이도 좋아하니 말이다.   

지난번 기포 피카츄가 생각나서 계란을 체에 걸렀다!

둘째는 돌봄 교실에 가서 도시락을 연 뒤, 친구들에게 자랑을 한 후 먹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은 유부초밥, 김밥, 햄 등을 구워 넣은 도시락을 가져왔는데 자기만 춘식이 도시락이었다고 둘째가 방방 뜨며 말했다. 춘식이 도시락이 정말 꿀맛이었다고 하길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김과 맛살과 치즈여 고맙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운동회가 있었다. 둘째가 오더니 자기는 오늘 도시락을 싸가면 안 되냐고 묻는다. 학교 급식을 하는데 웬 도시락? 왜 그러냐고 했더니 춘식이 도시락을 또 가져가고 싶다고 한다. 오~ 얼굴만 동동 뜬 춘식이 도시락이 이렇게나 효과가 있었다니. 둘째가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었다.


자기는 둘째라서 너무 힘들다고 매일 투덜댔던 어린이. 오빠랑 남동생 사이에서 너무 힘들다나. 그런데 춘식이 도시락을 본인만 싸가게 됐으니 사랑 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아이를 기쁘게 하는 일이 이렇게 사소한 것이었다니. 고마워. 도시락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하게 웃어줘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