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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Oct 14. 2024

한 글자도 이어지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Image by Peter Olexa from Pixabay

한 글자도 이어지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책상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며칠 동안 반복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힘없이 지켜보며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며칠을 허비했을까, 오늘만큼은 글을 써보겠다고 크게 마음먹은 뒤 노트북을 열었다. 커서가 눈앞에서 깜빡인다.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창을 내려버렸다. 이야기는 여전히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한 채 괜히 예능 한 편을 틀어두고는 집안을 돌아다녔다. 양쪽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계절의 축축함에 코를 킁킁거린다.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는 어디에서 온 걸까. 반가운 흙내음에 며칠 전 딸과 함께 미지근한 물에 담가 두었던 연꽃 씨앗이 생각나서 가봤다. 하나는 새싹이 올라와서 황토 속에 넣어줬는데 하나가 도통 소식이 없어 애가 타고 있었다. 물속에 있는 씨앗을 가만히 바라본다. 밤사이 씨앗 위에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와 있다. 드디어 새싹이 나오려나 보다. 고개를 쭉 빼서 씨앗을 더 자세히 관찰했다. 초록색 무언가가 보인다. 딱딱한 씨앗 바깥으로 새싹이 고개를 내밀면 바로 옮겨줘야지. 그런데 황토가 부족한 듯 보인다. 씨앗 물을 갈아주며 황토를 배달시켜야겠다고 읊조렸다.     

황토를 주문하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놓곤 그새 까먹었다. 씨앗 얘기를 써볼까 싶어서 괜히 노트북 앞을 서성인다. 씨앗에 기포가 올라온 건 살아보겠다는 발악일까, 나 여기 있다는 희망찬 통화음일까.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어떤 글을 쓸지 고민했으나 문장은 여전히 이어지지 않았다.      

글은 한 문장도 완성하지 못했음에도 배가 슬슬 고파온다. 가볍게 배추전이나 구워 먹어볼까. 재빨리 일어나서 알배추와 부침가루를 꺼내온다. 명절마다, 제사 때마다 큰삼촌은 할머니에게 와서 배추전을 빨리 부쳐서 몇 개 달라고 했다. 나는 고기가 들어간 동그랑땡도 있고 언제 먹어도 황홀한 동태전도 있는데 왜 하필 맛도 없는 배추전을 달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그때의 삼촌 나이가 되자 갑자기 배추전이 좋아졌다. 이건 어른이 돼야 알 수 있는 맛이었구나.

젓가락으로 배추전을 가져와 입안에 넣었다. 배추전의 기름으로 입술이 반질거린다. 아삭아삭 줄기가 입안에서 씹힐 때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밥은 이렇게나 매일매일 잘 넘어가는데 글은 왜 써지지 않는 것일까. 집안의 적막함이 싫어서 괜히 틀어둔 예능 한 편은 나에게 그 어떤 대화도 건네지 않은 채 언제 끝났는지 어느새 다음 편으로 넘어가 있다. 그새 배추전도 말끔히 먹어치웠다. 그러나 글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Image by Peter Olexa from Pixabay


노트북을 열기만 하면 에이포 두 장 분량의 글은 어렵지 않게 완성했던 나인데, 어느 날 그런 내가 사라져 버렸다.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내려갔던 내 모습이 말라버렸다. 이제 글을 쓸 수 없게 된 것인지 너무 슬퍼서 괜히 예전에 썼던 일기장을 몽땅 가져왔다. 예전엔 어떻게 글을 썼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기라는 것이 기쁜 날보다 괴로운 날 더 잘 쓰였나 보다. 괴로웠던 발자취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누구를 미워하며 살았다니 이게 나인가 싶어서 또 한 번 좌절하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예전엔 어떻게든 성과를 내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어느 순간 그런 모습이 사라진 상태이었고 나를 괴롭혔던 모든 이에 대한 저주는 그럴 수도 있다는 이해로 바뀌어있었다. 그것이 연민인지 비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예전처럼 철저히 미워하지만은 않았다. 나도 모르는 내가 일기장에서 기포를 보글보글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때야 알았다. 내가 글을 못 쓰게 된 이유 말이다.

    

직접 경험한 것들만 문장으로 정리했던 나는, 내 감정에 몰입된 나머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 내가 불편한 것을 토해내지 않으면 내가 삭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운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속 시원했을지 몰라도 그러한 내 글쓰기 방식이 누군가에겐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누구나 타인의 글에 자신이 멋지게 남아있길 바랄 것이기에 자신을 비판하는 문장을 마주하면 너무도 불쾌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 동안 마주치는 모든 사물의 비틀림을 참아가며 새로운 감정을 생성해 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것을 조심하려고 한다. 삼촌이 좋아했던 배추전을 갑자기 이해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고 무조건 지르고 내달리기엔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할 것이 많아서 글 앞에서 움츠리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할 것이다. 모쪼록 그것이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잠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내 손을 만지는 느낌이 들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두 돌도 안 된 막내가 깨서 나를 찾는 것일까, 부쩍 무서운 것이 많아진 둘째가 화장실에 같이 가달라고 나를 깨운 것일까.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남편이었다. 로맨틱함은 사라지고 삶이 촘촘히 우리 사이를 채우고 있는 나날이 계속됐기에 예전 같으면 웃어넘겼겠지만 나는 대번에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다. 무뚝뚝하던 남편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작고 예뻐서. 그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서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내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글도 이 손으로 쓰고 두드리는 것인데 나는 왜 미움의 흔적을 남기고 살았나 싶다. 글이 안 써진다는 것은 아직도 화나고 서운하고 실망하는 이야기들이 손끝에 담겨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 감정들을 손끝에서 털어내는 순간 좋은 글이 샘솟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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