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가 파리에 갔다. 그곳에서 가브리엘이라는 남자를 만났고 뜨거운 사랑을 이어가다가 복잡한 사정 때문에 헤어졌다. 에밀리는 매력적이어서 그런지 곧바로 다른 사랑이 찾아왔다. 그래서 로마로 떠났고 행복해 보였다. 반면 남자는 슬퍼 보였다. 가장 원했던 경력을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에밀리가 지금 곁에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말이다.
에밀리는 이제 로마에서 살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 가브리엘. 그의 충격받은 표정에서 엄청난 통쾌함을 느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에밀리가 그에게 던져준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알아서 잘 사는 것이 제일 시원한 한 방이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면서 궁금한 것이 생겼다. 에밀리는 로마에서 가브리엘을 잊은 것인지 말이다.
여러 번 돌려본 장면이 있는데, 에밀리가 가브리엘의 소식을 자신의 상사에게 전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클라이언트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보였다. 오랜 시간 감정을 교류했던 사이였는데 그렇게 덤덤하게 남의 이야기하듯 소식을 전할 수 있다니. 새로운 사랑이 에밀리의 감정을 정리하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도시가 그녀에게 근심 걱정을 잊게 만든 것일까.
이 장면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나도 에밀리처럼 과거의 괴로움을 잊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떨쳐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생각할 여력도 없이 지금이 행복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는 상태로 말이다. 그 점에서 에밀리가 정말 부러웠고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시즌4의 마지막 화를 계속해서 돌려보고 있다. 내가 정말로 바쁘고 행복하면 잊고 싶던 기억을 지워버린 채 현재를 아름답게 꾸리며 살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에밀리는 가브리엘을 잊지 못한 것 같다. 그에 대한 감정을 잠시 일시정지 시켜놨을 뿐 풀어내지 못한 감정의 파고는 파리로 돌아가는 즉시 살아날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는 가브리엘과의 그 어떠한 추억도 없기에 새로 경험한 감각들에 몸을 맡길 수 있지만 파리엔 가브리엘과의 추억이 너무도 많아서 복합적인 감정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밀리는 로마에 있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경험과 기억으로 즐거움만 쌓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이제 나쁜 소식들을 내 귀에서 차단해 좋은 감정만 남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생각과 행동을 담아낼 벽지들이 계속해서 희망으로 가득 찬 색채를 뿜어냈으면 좋겠다. 에밀리가 로마와 사랑에 빠진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