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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Feb 27. 2019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정상적인 성장을 억제할 때 발아 현상이 나타난다. 발아 현상이 나타나는 난자는 아흔여섯쌍의 일란성 쌍둥이를 탄생시킨다. 공유, 균등, 안정의 실현은 인간의 표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죽지 않을 정도로 생명력을 압박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표준화하기 위해서는 생존을 위해 신체를 변화시켜야 할 정도의 스트레스가 주어져야만 한다.

멋진 신세계의 미래는 이른바 개량종의 세계다. 인간은 구미에 맞추어 많은 동식물을 개량하고 효율적으로 찍어낸다. 인간적인 지식이 부족해야만 하는 엡실론 계급을 만들어내고,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은 얼핏 비도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현재의 인류가 수많은 동식물에게 하고 있는 행위와 같다.

사실 멋진 신세계의 세계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고 무엇보다 편리하다. 하지만 왜 우리는 그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합리적이고 불안정하며 유동성으로 인하여 예상된 행복보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이 닥쳐올 높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멋진 신세계의 합리성보다 비합리성을 지닌 세계가 더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멋진 신세계의 세상이 인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도덕의 우선순위, 사유의 개인주의를 사라지게 한 채, 누군가(국가)가 정해놓은 가치에 따라 행복을 정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지식은 덕과 행복을 증진시키나 전반적인 지식은 지적 견지에서 볼 때 필요악이기 때문이다. ... (중략) ...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무늬를 도려내는 자들이나 우표수집가들이다." 멋진 신세계 초반에 나오는 문장은 고통과 고민에서 나오는 사고와 선택의 가치를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유전자와 환경, 사고의 흐름에 따라 사유를 구성한다. 그 과정에는 불필요한 배움과 익힘이 있고,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있으며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성장과 생애를 통해 만들어지며 고통 또한 내가 가지는 생의 선택에서 발현되는 또 다른 결과물이다. 이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것이고, 내가 결정해 내가 서술한 나만의 존재 방식이다. 멋진 신세계, 그리고 1984의 세계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텍스트로 만들어진 이 세계가 나만의 존재 방식을 임의로 조정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삶의 존재 유를 찾는다. 이는 "전반적인 지식"을 넓혀가는 과정이자, 자신이라는 한 권의 책을 서술해가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고통의 역사가 없다면, 인간의 세계는 한정적으로 좁아진 채 결코 넓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존재는 나의 철학에 근거한다. 그리고 나의 철학은 나의 독특성에서 산출되며, 나의 독특성은 나의 존재를 증거한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울지라도 그 누구도 나의 존재를 앗아갈 수는 없다. 나의 고민은 나의 것이고, 나의 고통도 나의 것이고, 나의 괴로움도 나의 것이다. 이 모든 역사는 나를 통하며 나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는 주어지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닌 나만의 카타르시스와 생의 열망이라는 열매를 빚는다. 항구적인 불안을 겪는 인간은 절대적인 과학과 진리를 추구하고 완전한 존재인 신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영속적인 불완전이 있어 죽는 순간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구원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인간은 아름다운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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