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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Aug 20. 2018

"어느 가족(만비키 가족)"을 보고


원제는 만비키 가족, 바꾸어 말하면 "훔친 가족"이 되는데, 우리말로 하면 흥행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제목을 바꾼 것 같다. 하지만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만비키 가족"을 사용하지 않은 건 더러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아무튼 나름 스포 없이 리뷰를 써본다. 


대학시절 복지의 기본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시설에 입소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가족이라는 구성요소를 분해하지 않은 채 사회화의 과정이나, 복지 수급의 안정성도 가족을 통해 자택에서 이루어지는 게 좋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호의를 품고 나의 가족을 위해 노력을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한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만을 위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나'의 범위와 정의가 상당히 중요한데,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올바른 시스템을 보이기 위해서는 혈연에 의미를 두고 또 다른 '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킬 준비가 필수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각자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혈연은 서로에게 저주가 된다. 시스템은 혈연인 그들을 계속 엮어가고, 그 시스템을 벗어나기란 상당히 어렵고 곤란하다. 노인학대를 당하거나, 아동학대, 또는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자신을 괴롭힌 자식이나 부모, 결혼한 상대방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다. 여기서 혈연으로 이루어진 계약은 벗어나기 힘든 저주가 된다. '가족'은 '집 가'에 '겨레 족'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무리를 뜻한다. 그리고 가족의 무리는 반드시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을 필요는 없다. 혈연은 가족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서로 아끼고 사랑해줄 수 있는 동기가 충분하다면 혈연으로의 계약이 아닌 사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좋은 가족이 될 수 있다. 


전작인 '세 번째 살인'에서 법률 시스템은 잘못을 가리는 과정이 아닌 서로 간의 합의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만바키 가족'에서 그 논지를 이어간다. 만바키 가족은 분명 도덕률이 흐릿하고 죄를 저지르지만 누군가의 애정을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은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들의 삶은 훔침을 통해 이루어지고 훔침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그들의 생활과 윤리의식은 문제를 만들 수밖에 없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웬만큼 균형 잡혀있다. 사람에 버림받고 커다란 상처를 받아 법률적으로 회복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해 살아간다. 사람과 법에 배신당한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살아가며, 서로에게 사랑을 전달해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을 잇는 건 단순히 애정만은 아니다. 돈이 필수적 요소로 들어가고, 필요 상의 목적이 있기도 하며, 자신이 이룩하지 못한 가정에 대한 욕구불만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만바키 가족은 분명 서로에게 애정을 보이고, 서로를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 돈이나 목적이 있는 건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정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그들은 법률의 보호를 받기 어렵고, 법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유지할 수 없을 뿐이다. 만바키 가족의 모습은 "내가 낳고 싶어서 낳은 아이가 아니"라거나 "어쩔 수 없이 생긴 가족"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해 살아가는 그들은 필요에 의할지라도 서로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선택에 의한 가족보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반드시 장담할 수는 없다. 


선택에 의한 가족은 선택에 의해 흩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분명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도둑질을 배우고, 도둑질을 해나갈 수밖에 없는 자신과, 점점 자신을 닮아가는 동생을 보며 특정한 선택을 한 것처럼 모두를 위해, 때로는 타인을 위해 만비키 가족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책임진다. 같은 집에 살아가며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서로를 아껴주는 행위를 하며 고로케를 먹는 모습마저도 닮아간다는 건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가족이다. 나를 위해 버리는 게 아닌, 너를 위해 놓는다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다.


만비키 가족은 구성원을 훔쳐 오지 않았다. 그들은 유괴를 하지 않았고 유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버려져있는 것들을 주웠을 뿐이다. 오히려 버려져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을 주워 소중한 가족으로 삼았다. 혈연이, 그리고 사회가 무가치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버려놓고, 나중에 훔쳐 갔다고 죄를 씌우는 건 너무나 부당한 일이다. 법률이, 그리고 사회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비난하고 죄를 판정하는가? 시스템에 벗어나는 사람을 죄악으로 취급해 버리는 건 버려지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버리는 사람의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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