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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Aug 20. 2018

최인훈의 "광장 / 구운몽"을 읽고


명준이 바라는 삶은 단단함 속에 젖어들어가는 삶, 세상이 혼란스럽게 돌아갈지라도 마음을 쏟아 낼 수 있는 삶이다. 자그마한 앎을 가지기 보다 마음의 믿음을 뿌리로 삼아, 깨어지고 다치고 정강이가 벗겨지더라도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늙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명준은 그만큼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존재를 찾고 있으나 그의 눈에 채이는 것이 없다.


광장은 공유의 공간이며 모두를 보호해야 하는 곳이다. 탁 트인 광장은 모두가 함께하고, 모두가 모두를 볼 수 있고, 때에 따라 자유롭게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은 광장에서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만든다. 정치에서 나오는 오물은 치워지지 않고 경제는 교활하며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화조가 만들어지고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며 치안이 있어야 하지만, 혼탁한 광장은 마치 짐승의 세상과도 같다. 사람들은 광장에 나가지 않고 밀실에 들어가 개미처럼 물건을 물어다 방안에 쌓아 놓는다.  광장은 개인과 개인을 잇는 공간이자 출구다. 권력자들은 광장을 흐려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밀실의 문을 부수어 개인을 죽이려 한다. 한국의 광장은 그렇게 죽어 있다.


정치와 법,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광장은 개인을 보호하기보다 개인의 충성도를 높여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리고 그 국가를 움직이는 건 몇 명의 부르주아와 권력을 가진 세력이다. 개인이 편하게 살기 위한 방법은 국가의 가르침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고민과 사고, 개인의 목적이 뚜렷할수록 삶은 괴로움을 더한다. 철학을 전공한 명준이 바라는 건 개인이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서 개개인의 존재를 발하며, 스스로 그를 이룩하기 위해 불타는 열정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쇠약하고 유약하며, 국가를 자신과 떨어뜨려 생각하는 자아를 갖춘 명준은 국가에게는 처리 대상에 불과했다. 인민을 위한다는 북한도 역시 실상은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인민을 통해, 인민을 위한  정부를 이야기했으나, 북한은 그저 마르크스의 이론을 사회주의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 개개인을 광장으로 이끌어 내지 않고 장기말로 둔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타인을 돌아보지 못한다. 오직 자신의 삶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이 높아지기를 바란다.


명준이 바라는 불타는 삶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광장의 존재와, 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스템은 가능할 수 있을까? 그리고 명준은 그저 원망으로만 만들어져 있는 태도에 정당할 수 있을까? 사회는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볼셰비키의 혁명은 소수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프랑스 시민혁명도 모든 사람을 위한 혁명은 아니었다. 결국 혁명이란 진정 아래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집단이 상위의 특정한 집단을 갈아치우기 위해 사용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자아를 가진 주인이 되는 세상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그만큼의 자아를 사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은 그저 끼니를 걱정하며 오늘의 밥을 잘 먹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명준은 자아를 지닌 지식인으로서 본인이 목표로 하는 불타는 삶을 위한 행동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명준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단지 자신에게 온 마음을 열어 사랑해주는 여자를 바라는, 사랑을 쫓는 남자일 뿐이다. 개인은 개인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개인과 집단에 대한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광장은 밀실이라는 안전한 개인의 공간에 적을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명준이 가진 "불태우고 싶은" 공익의 광장의 존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는 고찰을 거듭한다. 명준이 진정 바라는 건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육체와 정신을 함께 하는 완성적 사랑인 것이다. 그가 바라는 광장은 모두가 존중받으며 모두를 보호하는 광장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공간을 지키고 그 공간에 들어오는 모두가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개인의 밀실로서의 광장이었다. 바뀌어버린 명준의 광장에 대한 정의를 쇠락이나 쇠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그가 남한에서 계속 살아남았다면, 또는 4.19 혁명과 6월 항쟁을 겪었다면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는 미지수로 남지만 그는 완성되지 않는 광장을 바라보며 개인주의적인 남한과 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조종하는 북한의 모습에 낙심했을 것이다. 그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온 바다를 돌아다니는 갈매기를 보며 모두를 포용하는 광장이 다름 아닌 바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은혜의 모습을 닮은 모성의 바다는 명준이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세상의 광장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테지만 마음을 다해 태울 수 있는 명준의 광장은 완성된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스륵 아쉬움이 남는다. 애당초 명준이 바랐던 광장은 언젠가는 완성될 수 있는 걸까?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던 최인훈 선생님의 결론을 2018년이 된 지금도 부정할 수 없다는 건 사실 꽤나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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