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번도, 외할머니의 온전히 건강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고혈압으로 쓰러지셨고 그 이후로 신체의 오른쪽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나는, 외할머니가 무서웠다. 꽤나 싹싹한 성격의 꼬마였는데도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얼굴의 표정도 자유롭게 짓지 못하셨는데 그래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웃어주지 못하는 외할머니를 더 웃게 만들지는 못하고.
외가는 이태원에 있었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이니까 2000년이 되기 전에. 하얏트 호텔에서 경리단 쪽으로 내려오다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면 있었다. 반대 방향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는데 우리집이 있던 정릉에서 16번 좌석버스를 타면 해방촌 쪽에 내려서 길 거너 시장을 지나 걸어가면 되었다. 지금의 ‘경리단길’이 외가로 가던, 외가에서 사촌누나 동생과 뛰어놀던 길이었다. 외할머니는 그때만 하더라도 혼자서 매일 남산에 산책을 가시곤 했다. 힘드시진 않을까 늘 걱정했는데 씩씩하게 누구보다 건강하게 잘 다니셨다.
외할머니는 무서웠지만 이태원에 가는 건 좋았다. 우선, 엄마가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고 좌석 버스를 타고 먼 길을 가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집이랑 다른 동네를 그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면 중국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집에선 잘 먹지 않았던 중국요리를 좋아하게 된 까닭의 팔 할은, 외할머니 덕분일지도 모른다. 짜장면도 군만두도 탕수육도 함께, 외할머니랑 점심에 중국요리를 종종 시켜먹곤 했는데 특히 탕수육을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새콤달콤한 소스에 파인애플도 들어있다며 기분 좋은 웃음으로 드시던 모습이 기억에 훤하다.
이게, 전부다. 어렸을 때 그래도 외가에 꽤 자주 갔음에도 불구하고. 집수리 때문에 여름방학 동안 한 달을 외가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추억이 많이 없다. 그저 내가 무서워하고 불편해했기 때문이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살았던 할머니와 다르게 외할머니는 표정도 굳어 있었고, 거동도 자유롭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때가, 외할머니께서 제일 건강하던 시기였고 더 많이 살을 대고 응석을 부리고 그럴 수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멍청하게 한참 뒤였다.
사춘기가 지나고, 대학생이 되고 내 스스로가 조금 더 둥글 둥글 해진 사람이 되자 외할머니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제 외할머니는, 남산을 그렇게 산책할 수 없게 되었는데. 외가에 가면 소파에 앉아 반갑게 맞이하는 외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기고 손을 잡았다. 어렸을 땐,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외할머니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조금 더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안아 드리는 것. 나는 할머니의 손이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그렇게 두툼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계속, 어렸을 때 더 가까운 손주가 되지 못했다는 마음의 빚이, 짐이 있었다.
큰 딸의 아들. 맏사위의 아들. 손자. 외가에 가면 가족인데도 손님 같은 기분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아빠를 좋아하고 아끼면서도 중요한 손님으로 대우해주셨고 그 아들인 나도 그런 대접을 받았다. 다른 손주와 다르게. 그게 불편했고 외가에서는 그만큼의 거리가 계속해서 있었다. 그게 싫었다. 내 마음대로 다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겐 좀 더 가까운 손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종종 순댓국이나 맛있는 걸 사서 외가에 갔다. 혼자서든 보람이와 함께든. 한 번 일산시장에서 순댓국을 사서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걸 그렇게 좋아하신다는 이야길 듣고.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차리는 게 불편하실 테니까 사서 드리기만 했지 같이 먹고 오진 않았다. 순댓국을. 정말 좋아하셨는지 확인해볼 겸, 한 번은 같이 먹을 걸 그랬다. 외할머니가 맨날 과일이나 커피를 먹고 가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챙겨 먹을 걸 그랬다. 옆에서 좀 더 앉아있고 좀 더 손을 잡을 걸 그랬다. 철이 든 이후로는, 어렸을 때의 내가 부끄러운 이후로는 외할머니를 좀 더 많이 안아드리고 손도 잡고 그랬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럴 걸 그랬다. 그냥, 그냥 뭐든 후회가 되었다. 외할머니의 사진을 보고 있는데.
엄마의 엄마였다. 엄마가 사라지는 것을 상상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막상 엄마는 엄마를 보내드렸구나 생각을 하니,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속상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더 이상, 할머니가 남아있지 않았다. 아, 할머니. 나의 외할머니. 막상 곱씹어보면 어렸을 때의 외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셔서 자주 웃진 못하셨지만, 웃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단 한 번도 내게 화를 내거나 뭐라 하신 적은 없었다. 단지 내가, 내가 가까이 가지 못한 것뿐.
사실, 외할머니의 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도, 나중엔 조금 후회했다. 부끄러웠다. 마음 한 편으로는 아직까지 친가와 외가의 구분을 짓고 있는 거여서. 내가. 아빠의 엄마처럼 엄마의 엄마도 당연한 건데. ‘외’라는 글자 하나가 더 붙었다는 것만으로 손님이었고, 마음이 거리가 먼 가족으로 배웠다. 그렇게 자랐고 컸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다음의 세대에는 ‘외’라는 글자를 붙이지 말아야지 하고도 다짐했고, 주변 친구의 외가족상도 살뜰하게 챙겨야겠다 생각했다.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외할머니의 건강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게 무섭기도 했지만 항상 걱정이기도 했다. 그랬으면 좀 더 가까이 있었을 걸, 살가운 손자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무척 속상했다. 뒤늦게 잡았던 외할머니의 손을 더 많이 잡았어야 했는데. 본인의 그러한 모습을 남기기 싫어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한 장이라도 외할머니와 사진을 같이 찍었어야 했다고 무척 후회했다. 이렇게 두서없이 글을 쓰는데 온통 후회되는 것뿐이라서, 그것도 후회가 된다.
두툼한 만큼 따뜻했다. 외할머니의 손은 그러했다. 손을 잡는 걸 좋아하게 된 건 다 할머니들 덕분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도 외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렸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할머니가 휠체어도 없고 지팡이도 없이 가볍게 걸으며 즐겁게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꼭 그렇게 계셨으면 좋겠다.
2021.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