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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loco Mar 06. 2024

아무, 말.

아무렇게나 아무렇지 않은

보람이가 잔다. 리하가 잔다. 보람이는 아파서 자고 리하는 졸려서 잔다. 보람이는 아이를 키우며 예전보다 더 종종 아프다. 리하는 빠르게 말을 시작하고 더 빠르게 고집이 늘었다. 둘은 자고 나는 집에 혼자 남겨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쓴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확인하니 2022년 7월이다. 글을 써서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18개월이 넘도록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일이든 있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 때론 그랬다. 종종 무엇을 하고 사는 거지라고 묻게 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대체로 아주 바쁜 시기가 지나고 약간의 여유가 생기는 시점이었다. 일적으로든 관계로든 결혼생활과 육아로든.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간이 그 대부분의 것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샤워하러 들어가서 목덜미에 따뜻한 물을 쏴대며 몸의 온도를 높일 때에도, 고단한 몸을 침대에 구겨 넣어 잠들고선 꿈속에서도 그랬다. 남겨진 일을 생각했고 하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고 아쉬웠던 마음을 곱씹었다. 놓친 후회한 잘못된 등등의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는 종류의 일과 삶을 머릿속에서 계속 계속 떠올리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있었다. 그런다고 이미 지나간 것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1.5단계의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의학 용어는 아니지만 번아웃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5년을 버텼고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어떤 방식의 도움이 나에게 알맞은지도 몰라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병원을 가. 그리고 지금 너의 상태부터 파악해. 처음 찾아간 정신건강과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신체에 해를 가하는 행동을 하는지, 지금의 상태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지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나는, 아니었다. 순수한 삶, 에 대한 애착이 많기 때문에 돌려 말하면 겁이 많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할 예정이 없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냐면, 무리는 있지만 문제는 없이 일을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하신다면 약물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상담을 선택하실 수 있어요. 네, 그럼 저는 상담을 고르겠습니다. 시간과 비용은 장담할 수 없지만요.


공감 능력이 좋고 이타성이 높은데 타인 수용 능력과 관대함이 낮아요, 네? 이게 무슨 소리죠, 쪼잔하다는 거죠. 아, 그렇군요. 심리, 성격 검사에 대한 결과를 1시간 동안 들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쪼잔해서 그런가 쪼잔하단 말만 생각나네 거참 쪼잔하게. (쪼잔하다는 말을 이 한 줄에 얼마나 쓰고 있는 걸까 쪼잔하게) 다시 말하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혹은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본인의 확고한 주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낮다는 것. 아, 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나와 타인을 괴롭히는 이상한 모순 덩어리의 집합체라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 예를 들어 근면성이 높은데 끈기가 낮다거나 타인과 거리 두기를 선호하면서 타인에게 의존적인 성향이 있다거나 하는. 아, 다시 봐도 피곤하네.


새해는 원래 3월부터 시작이니까. 1월 1일도 지나가고 음력설도 놓치고 나면 이제 새 학기라고 새 시즌이라고 뭐 그렇게 우기고 시작하는 게 보통 우리의 넓은 포용력이니까. (이럴 땐 포용력을 발휘해 본다. 쳇. 쪼잔하게.)  그 지난한 2개월 동안 마음에 들어온 몇 가지의 문장들이 있었다. 하나는 40대엔 치열하게 살고 50대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어느 감독의 인터뷰였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좋아 라는 문장이었다. 뭐 어떻게 좋아하는 문장도 이렇게 모순적인지 모르겠으나 나란 인간이 그런 인간인 걸 어떻게 해. 아직 병원과 약국에서는 만 38세라고 해주니까 그래, 남은 시간은 더 치열해질 (아, 아찔한데) 40대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갖자고 다짐했고 오히려 좋아, 는 올해의 모토 같은 걸로 삼아볼까 하는 중이다. 그렇게 해야, 해야만 마음이 좀 더 평온해질 거 같아서.


어느 출근길에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좋아하는 음악으로 채워놓은 리스트만 듣다가 이유 없이 마음 철렁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딱히 죽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번민과 고통과 아니 그냥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고 하면 뭐 너무 모든 게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서. 그렇게 철렁하고선 마음의 delete 키를 눌러버리는 거다. 오히려, 좋아하고. 그 정도면 위안은 된다. 위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막 웃고 그럴 수는 없지만.


그렇게 기질 및 성격검사에서 가장 높게 나온 항목은 정서적 감수성이었다. 보람아 리하야 미안. 나는 좀 여러 모로 피곤한 아빠가 될 거 같아.


2024.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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