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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loco Apr 06. 2022

16주 3일. 아빠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오피셜] 정우와 보람, 딸을 영입.

오늘 드디어 성별을 확인했어. 13주 차에 선생님이 미리 언질을 주시긴 했지만. 엄마는 계속 입덧 중에 순댓국이라든지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을 찾으면서 이 아이는 아재가 틀림없다고 주장했거든. 엄마 말만 들으면 왠지 삼국지의 장비 같은 아저씨가 태어날 것 같았는데. 뭐, 그래도 3주 동안 성별이 바뀌는 일은 없었어.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안타깝게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뭐랄까. 그냥 무덤덤한 기분이었달까. 성별이 내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거든.


솔직히 예전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들을 낳고 싶다도 아니고 낳아야 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나는 가정 교과서에 나오는 6인 대가족 집에서 자랐어. (-이렇게 쓰면서 너가 컸을 때에도 교과서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 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편하게 쓰도록 하자-)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집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빠, 전업주부 엄마, 누나, 나, 강아지 한 마리까지. ‘대가족’이라는 그림에 알맞은 형태였던 집.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내려오셔서 홀로 이 가족을 이루셨고 아빠는 첫째 아들로 장남의 책임감을 성실히 수행하는 분이셨지. 그러니까 첫째는 누나였어도 아들이라는 이유로 장남의 아들, 장손이라는 역할이 내게 주어진 거야. 그래서 뭐가 좋았냐고? 뭘 했냐고? 뭐 특별하게 받은 것도 없고 하는 일도 없었는데.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의 할머니는 그렇게 좋아하셨대. 누나가 온 집안의 첫째였는데 그때랑 또 다르게 말이야. 그리고 나의 아빠는 ‘이제 공놀이할 애가 생겼네’라고도 하셨대. 물론 아빠는 기억도 못했지만. 그래서 나의 엄마는 ‘아들 안 낳았으면 큰 일어날 뻔했네’라고 생각하며 서운해하셨대. 그러니까, 이게 우리 가족의, 아니 내가 자란 우리 사회 대부분의 인식이었어.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자연스럽고 많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아들을 낳아야 인정받는 분위기였고 대체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그런 세상. 웃기지? 너가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땐 부디 이게 웃기는 에피소드여야 할 텐데.


그래서 나도, 그렇게 자랐어. 나의 부모님은 다행히도 딸과 아들을 첫째와 둘째를 구분 짓지 않고 키우셨고 세상은 많이 바뀌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아들을 낳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 아들을 낳아야 하는구나 라고. 그게 내가 장손이니까 이 집을 이어 가야 한다고. 대를 잇겠다는 뭐 그런 생각. 나 같은 아들을 낳아서 공놀이도 하고 그런 거. 목욕탕은 내가 별로 안 좋아하니까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주변에서 하도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인식을 갖고 있게 된 거야. 공부가 최고의 목표였던 10대 때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그렇다고 공부만 한 것도 아니지만) 오히려 20대가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것도 할머니 엄마랑 셋이서 밥을 먹는데. 그런데 다행히도 그런 생각은 사라졌어. 뭐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니면 너가 알면 서운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낳을까 말까의 고민부터 하게 되었으니까. 성별은 아무것도 중요한 게 아니더라.


딸이라는 소식을 전하니,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 대체로 딸이 최고래. 요즘은 뭔가 첫 딸이 인기가 많더라고. 물론 첫 딸은 아빠 닮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 너는, 너는….. 엄마를 닮아야 하는데. 엄마가 훨씬 더 이쁘거든. 성격은, 성격은…. 이 글을 엄마가 볼 테니까 여기까지만 쓰자. 그래서 대부분 좋은 이야기를 들었어. 기분이 좋더라. 뭔가 으쓱한 기분도 들고. 사실 딸이든 아들이든 주변 사람이 뭐라 하진 않을 거 아냐. 아이를 가졌다는데, 성별이 나왔다는데 축하면 축하하지 뭐라 할 건 아니잖아? 몇 가지의 염려도 들었지만. 근데 그 염려를 듣는데 불편한 생각이 들더라.


“어렸을 땐 딸이 편한데, 나중엔 아들이 낫지. 걱정 덜 하고 좋잖아.” 나는 이게 지금의 우리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해. 아들이든 딸이든, 남자든 여자든 키우면서나 다 커서나 ‘걱정’할 일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걸 걱정해야 하는 세상은 뭔가 잘못된 세상이잖아. 근데 그게 한쪽 성별에 기울어져있다면, 여전히 그런 세상이라면 그건 이상한 거지.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요즘은 여자가 더 기회를 많이 받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 그들은 적어도 ‘사는 게’ 걱정이진 않을 거 아냐. 그런 사람이 아들을 낳는다면.


기쁨아, 아빠 페미니스트 아니지만.

그냥 낳아서도, 키워서도 모두가 걱정할 것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유별나지 않은,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



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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