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주유는 피했지만 원정 쇼핑은 여전히 필요해요.

by 김노하 Norway

아이들이 부활절 방학을 했다. 주말 포함 총 9일이다. 집에만 있을 수는 없어서 스웨덴 예테보리로 여행을 다녀왔다. 보통 부활전 연휴는 스키를 탈 수 있는 마지막 시기지만 올해는 눈 덮인 산 대신 외식과 쇼핑을 택했다. 오슬로에서 예테보리까지는 차로 세 시간 반. 고속도로를 달리다 도로 표지판에 노르웨이어에는 없는 알파벳(ä, ö 등)이 보이기 시작하면 '아, 스웨덴으로 들어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국경 검문소도, 여권 검사도 없다. 부산에서 대전을 가는 것만큼이나 경계는 희미하다.


세계 10대 산유국이자 1인당 GDP가 세계 최고 수준인 노르웨이지만, 정작 이곳에 사는 이들의 일상은 꽤 팍팍하다. 이란 전쟁의 여파로 기름값은 리터당 30크로네(약 4,500원)에 육박하고, 먹거리와 생필품 물가는 무섭게 치솟았다. 산유국 국민임에도 세일 품목을 골라 장을 봐야 하는 역설적인 현실. 소비 갈증이 쌓인다. 그리고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노르웨이 사람들은 가끔, 요즘은 자주 국경을 넘는다.






촌스러움을 자처하는 '

해리한델(Harryhandel)'의 물결


노르웨이에는 '해리한델'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촌스러운 쇼핑'이다. 2002년 당시 농무부 장관이 싼 물건을 찾아 스웨덴 국경을 넘는 국민들을 향해 "참 촌스럽다(Harry)!"라고 일침을 가한 것이 발단이었다. 'Harry'는 노르웨이 속어로 세련되지 못한 취향을 비꼬는 말인데, 장관은 고작 고기 몇 킬로그램과 콜라 몇 병에 자존심을 버리는 행위가 품격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들은 모욕감을 느끼는 대신 "그래, 나 촌스럽다! 그게 뭐 어때서?"라며 당당하게 이 단어를 받아들였다. 이제 해리한델은 노르웨이의 정책과 개인이 느끼는 소소한 행복이 충돌하는 지점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미래 세대와 환경, '품격 있는 복지 국가'라는 거창한 목표를 위해 고물가와 고세율을 고수하지만, 시민들은 리터당 몇 백 원이라도 싼 기름값과 세금 폭탄을 피한 술, 담배를 위해 기꺼이 국경을 넘는다. 이 '촌스러운 쇼핑'은 엄격한 시스템이 설계한 궤도에서 잠시 이탈해 숨을 쉬게 해주는 심리적 해방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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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노르웨이 거주 중, 교사, 글작가를 돕는 작가, <노르웨이 엄마의 힘>, <아티스트 웨이, 우리 함께>, <노르웨이 사계절과 문화 여행>, 전자책 <글쓰기 셀프코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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