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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하 Norway May 27. 2024

보토, 널 심각하게 가지고 싶었어.

미니린. 노하 작가. 


작년 연말, 나는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문구점을 여러 번 들락거렸다. 문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노르웨이에선 문구점에 잘 가지 않는다. 샤프심 하나가 삼천 원, 지우개 하나가 삼천 원이다. '그럼 공책은 얼마나 비쌀까?' '그 돈이면 우리 애들 쓸 것을 하나 더 사줘야지. 괜히 구경하러 들어갔다가 예쁜 공책, 마음에 드는 펜이라도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동안 잘 참았는데, 공책이 점점 사고 싶어졌다. 


'나에게 필요한 것 같아.'

'한 해를 열심히 보낸 나에게 이 정도 선물은 할 수 있잖아?'


대충 아무 공책을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맘에 쏙 드는 디자인을 가진 공책을 사고 싶었다. 그리고 이 스타일로 다음에 비슷한 것을 살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고르고 골라서 가격을 보면 다시 내려놓게 된다.

'정말 너무 비싼거 아니야? 이게 2만원? 헉. 이건 3만원?'

'한국에서 사면 훨씬 예쁘고 살텐데' 


사실 그동안 아무 공책에나 모닝페이지를 쓰고 싶지 않아서 고민하지 말고 편하게 디지털로 쓰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침부터 컴퓨터를 켜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모닝페이지는 쓰고 싶은데 자판을 두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아날로그로 모닝 페이지를 써야 하는데. 


'이 돈을 주고 공책을 사야해? 사지 말아야해?' 


정말 가끔은 이렇게 해도 마음에 안 들고, 저렇게 해도 마음에 안들 때가 있다. 보통 그러면 나는 아예 하질 않는다. '에잇. 몰라! 안 할 거야!' 그러나 모닝 페이지는 이미 ‘에잇, 몰라!’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즐겁고, 필요하고, 그래서 계속하고 싶은 것이었다. 



때로는 나를 위한 용기와 과감함이 필요하다.


나는 세 번의 망설임 끝에 작은 꽃무늬가 그려진 연분홍색 공책을 샀다. 꽃무늬는 평소 내 스타일이 절대 아니다. 원색보다는 파스텔 색은 좋아하지만 연분홍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벚꽃이 연상되는 표지의 공책이 계속 마음에 끌렸다. 뭔가 따뜻함이 느껴졌다. 움켜 잡았을 때 표지가 딱딱하지 않고, 보들거리는 가죽 커버의 느낌이 좋았다. 난 그 공책을 사고야 말았다. 그냥 공책이 아니라 모닝페이지를 쓸 공책이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데,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미소가 넘쳐 큭큭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이게 뭐라고.'


드디어 내 모닝페이지를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노트가 든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 거렸다. 공책 커버를 매만지니 연분홍색 커버가 눈앞에 그려졌다. 

 


이제 이름을 붙여줄 차례인가?

20대 때, 아이들과 수업할 카페 이름을 ‘분홍 돌고래의 국어 교실’이라고 지은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돌고래를 좋아했는데, 아마존 강에 사는 분홍 돌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글을 읽고 조금은 충동적으로 카페명을 정했던 기억이 난다. 이 분홍 돌고래의 영어 이름은 ‘보토’다. (Amazon River Dolphin, Boto, Boutu, Pink River Dolphin 라고도 한다.) 보토는 호기심도 많고 장난도 좋아하는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수영을 즐긴다. 귀여운 보토가 아마존 강을 헤엄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너무 예쁜데 멸종 위기라니. 


나는 정말로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다. 그런데 또 충동적으로 노트 이름을 정했다. ‘새벽의 보토 Boto’라고.

희미해져 가는 나를 붙잡고, 되살리기 위해서. 나의 어린 장난꾸러기, 아티스트를 돌보기 위해서. 


예전에 내가 써야 했던 모든 글은 보여주기 위한 것, 평가받기 위한 것,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토에게 털어내는 것은 정말 그 어디에도 속하는 글이 아니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 나도 몰랐던 것들이다. 자유로운 글자들의 향연이다. 어린아이가 물을 신나게 첨벙거리듯 나는 온갖 방법으로 자유롭게 펜을 움직인다. 이야기를 하다 멈춰버리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시를 하면서 앞줄과 뒷줄을 오가기도 한다. 더욱더 자유롭게 보토가 가자는 대로 글자로 가득한 강줄기를 따라 헤엄친다. 

아날로그 보토와 나는 결국 만났고, 서로의 촉감을 느끼며 논다. 
천진난만하게. 때로는 무질서하게. 아침마다 만나서 논다. 



작가소개가 계속 됩니다. 


미니린 (노하Kim)


노르웨이와 한국,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어요. 어떤 일을 새롭게 기획하고, 함께 도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엄마, 작가, 샘으로 살았고 작가 크리에이터로 살고자 합니다.


https://brunch.co.kr/@norwayhouse#info


@minirin.noha  

@nohakim.writer


뉴아티 글쓰기 북클럽 작가팀 : https://naver.me/xuiQO8GZ

블로그 : https://blog.naver.com/norwayfriend

책 : 노르웨이 엄마의 힘(황소북스, 2017)

      초보자도 전자책 작가로 만드는 글쓰기 셀프코칭(전자책, 202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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