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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원 Oct 21. 2018

그들도 우리였다.

   



지독히도 더웠던 올해 여름 몇 년 만에 외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들어 있는 추모관은 찾았다.

지구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낙원을 찾아 떠난 듯 뜨거운 태양빛 아래 수많은 소나무들만이 바짝 마른 상태로 힘들게 서 있었다.

추모관 입구에는 젊은 날에 먼저 떠난 유명 연예인들의 추모비들이 먼저 보인다.

죽어서도 무언가를 홍보해야만 하는 그들의 모습에 왠지 모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몇 해 전 멕시코의 지후 아타네호에서 낯설게 만났던 낮은 태양이 어느샌가 나를 쫓아 우리나라까지 온 듯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소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나무들은 키가 자라 더 이상 처음 모습이 아니 었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들 사이에서 이름표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땀은 한 여름 장맛비처럼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두 분을 찾아야만 했다.

이름표를 하나둘 확인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이름과 사진 등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익숙한 이름도 있었다. 물론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보게 된 그들의 사진, 혹은 가족사진...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본 탓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순간 셀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땀과 함께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와 내 가족이 살아있다는 안도감, 또 언젠가는 그 사진 속 인물이 나 , 혹은 가족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

그들도 결국 나, 그리고 우리였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사실은 내가 느꼈던 안도감은 절대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젠간 이 곳의 수많은 나무들처럼 우리 역시 결국 한 그루의 소나무로 남게 될 테니 말이다.  

   

사실 삶은 찰나의 순간이고 우린 단지 현재의 매 순간을 영원처럼 느끼는 것뿐이리라. 

우리는 매 순간을 조금씩 저장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미래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미래는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되며 또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100년 후 이 모든 것은 한낮 누군가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특히나 고통, 고난의 시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느끼고 뒤를 돌아본 순간 시간은 셀 수 없이 많이 흘러있을 것이다.

오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너무도 기다린 순간들도 돌아보면 이미 오래전일이 되어버린다.

그토록 더디던 시간들은 수십 년이 되어버려 지나가 버리기 일쑤다.

그러다가 보면 우리의 시간은 결국 끝을 향해 온다.

머지않은 순간에 나는 그 소나무 사진 속에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 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 또 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에는 삶과 죽음이 한 바구니 속에 함께 담겨 있다.     

늘 정답이 없고, 증명할 수 조차 없는 문제들은 나를 괴롭힌다.


먼 산이 보이는 언덕에 위에서 나무들이 더 자라면 보이지 않을 먼 곳을 바라봤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우리처럼 다음에 오면 사라질 풍경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브런치에 처음 쓴 글도 아마 두 분에 대한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살아 계셨었다. 그리고 작대기처럼 작았던 소나무에 할아버지를 모셔왔던 순간도 기억의 한편에 존재한다.

지금 두 분의 소나무는 나보다 키가 한 참 크다.

할머니의 옷가지를 태우며 느꼈던 슬픈 감정도 잊고 산지 오래다.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를 몹시도 그리워하던 시간이 너무도 그리운 순간이 있다.

헤어짐이 슬픈 것은 단순히 사람과의 이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찰나의 행복했던 그리운 순간이 사라져 버린다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사라지고 결국 증명할 수 없는 나의 기억만 남기고 모든 것은 시간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너무도 덤덤해져 버린 인간의 껍데기만 남는다.

인간의 감정이란 결국  사라져 버리는 우리의 시간과도 같다.

증명할 수 없는 시간 말이다.     

언젠가 죽음은 나의 시간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삶이 찰나의 순간이라면 죽음은 어쩌면 영원일 수도 있다.

사라져 버리는 나의 시간과 추억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과 괴로움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삶이 사람들에게 더 소중한 이유는 하나다. 

그것은 바로 그리움이다.

사람을 그리고 지나가 버린 시간을 그리워한다. 

더 이상 내 삶 혹은 그들의 삶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늘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멈추지 않고 갈 테고 나는 시간을 쫓겠지만 그리움은 지쳐버려 화면에서 보이지 않는 마라토너처럼 멀짜감치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 순간뿐이라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 순간이 바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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