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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29. 2023

수능이 끝나고,



J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왜 하필? 이런 의문부터 들었는데, '수능만 끝나면'으로 시작되는 위시/투두리스트 중 독서가 상위항목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나마 읽고 싶다 했던 책들은 기억하기론 모두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입에 담았던 건 김훈의 소설이었다. 문학지문에 나온 에세이 문장이 근사하다 했던가. 여하튼 이것도 K피폐의 여파인가. 그러니까 산만하게 버둥거리는 마음에 비교불가의 묵직한 무게를 실어보려는 노력인가. J는 거추장스럽다고 책의 흰색 재킷을 벗겨놓았는데, 십년 가까이 책을 책장에 꽂아만 둔 나는 그제야 표지가 새빨갛다는 걸 알았다. 아침 등교길마다 J는 무표정한 얼굴로 강렬한 표지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나섰다. 그걸 볼 때면 마음이 좀...


J는 세 건의 면접을 끝냈다. 학추는 떨어졌고, 아이히만은 내던져졌으며, 광기의 뜨개질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책은 실패했지만, 뜨개질은 해냈다. 괜찮아, 네게는 아직 세 척의 배가 남아 있잖아, 네 1순위는 아직 남아 있어, 넌 면접프리패스상이야, 남편과 나의 화이팅이 이어지는 동안, J는 직사각형의 두툼한 무언가(어깨 숄인지 무릎덮개인지 모를 무언가)를 완성했고, 이어서 내 목도리를 2/3정도 짰다. 아빠 것도 떠줄까, 어느 날엔가 J가 실핏줄 어린 눈으로 묻자 남편은 정색하고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빠는 괜찮으니까, 어... 쉬엄쉬엄 해. 가끔씩 다리를 떨어대며 목도리 뜨는 걸 볼 때면 기분이 참....


그 와중에 나는 네 권의 책을 완독했다.



1.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빛나는 통찰의 순간들을 모은 에세이집. 어떤 통찰은, 날카로운 지성이나 풍부한 경험, 깊은 사유만으로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거리감이, 자신과의 거리감이 필요하다. 과거의 시간과 미숙한 자신에게로 되돌아가 샅샅이 들여다볼 용기도. 자기 방어나 연민 없이 냉정하게 해석하고 그건 그것대로 이해하려는 노력 또한.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진다." p61


2. <상황과 이야기

'논픽션 페르소나'라는 인상적인 개념을 필두로 에세이와 회고록 쓰기에 대해 논한다. 단지 ‘상황’을 나열하는 데서 벗어나 일상의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명료하고도 진정성 있게 들려줄 수 있는 서술자가, 픽션에서만이 아니라 논픽션에서도 필요하다는 것. 인용된 에세이와 회고록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분석은 근사하고 그 깊이가 남다르다. 고닉의 책은 <사나운 애착>까지 세 권을 읽었다. '상황과 이야기'부터 시작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그녀가 어떤 '논픽션 페르소나'를 선택했는지 염두에 두고서 회고록과 에세이를 읽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쉬웠다.


고닉 편 독서는 이렇게 마무리하는 걸로.


"결국, 보통 사람들이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만큼 사실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p106



3.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쇼코의 미소 이후로 오랜만에 읽는 단편모음집. 두 번 울컥했다. 하지만 남은 인상이 희미하다. 고닉의 책에 이어 읽어서 그런 것 같기도. 아니면 내 소설취향이 바뀌어가나 싶기도.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수록작 '몫' 중에서. p52  




4. 애나 렘키의 <도파민네이션


도파민 중독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고교필독서. 이러다가 전두엽은 AI에게 의탁하고 쾌락만 좇게 되는 건 아닌지. 스트레스를 핑계로 뇌를 잠시 쉬게 하려다가 뇌가 완전히 쉬게 되는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다. 일이 마무리되면, 수술을 받고나면,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하며 미루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쾌락보다는 고통, 이라는 작가의 말에 설복되기도 했고.


내 환자인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회복은 <해리포터>에서 덤블도어가 가로등 기둥을 밝히면서 어두운 골목을 걸어 내려갈 때의 장면과 비슷해요. 그가 골목 끝에서 발길을 멈추고 돌아봐야 골목 전체에 불이 들어온 광경이 보이죠. 그가 지나온 길의 빛을요." p278  




...그리고 지난주, 드디어 입시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다행히도 세 척의 배 모두 침몰하지 않았고 (눈물) J는 1순위로 원하던 곳에 문서등록을 무사히 마쳤으며 (눈물) 다음날 바로 부산행 티켓을 끊었다! 그건 놀랍지 않았다. '합격만 하면'으로 시작하는 리스트의 1번이 부산맛집투어였기 때문이다.


사촌언니와 부산시내며 기장 바닷가와 해운대를 휘젓는 동안 아이히만은 완전히 잊혔고 목도리는 미완성인 채로 책상에 놓여 있다. 아이히만의 재킷은 도대체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지, J가 떠준 첫 목도리가 내 목에 안착할 날은 언제일지 알 수 없고, 사실 영영 모른대도 좋다.


하, 나도 드디어 해방이다!


사실상 '육아'는 오래 전에 끝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자란다, 라고 생각했을 때
육아일기랍시고 각 잡고 쓴 마지막 일기는 작년 봄이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입시 관련 소고일 뿐. 
이제 입시도 끝났겠다, 성년을 목전에 둔 J를 보니
내 육아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는 체감상 오늘 같다. 

앞으로도 J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기는 계속되겠지만. 


딸, 합격 축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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