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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Feb 28. 2024

26. 소설가와 철학자의 반추, 회고적 감정, 그리고

나아가기 위해 돌아가야 할 때

돌아보면 내가 대충 덮고 떠나온 구덩이들이 보인다. 어떤 것은 작고 얕아 시간의 더께로 평평해져가고, 어떤 것은 한 시절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깊어 그걸 덮기에도 한 시절이 필요해 보인다. 떠나기에 급급하여 무엇으로도 수습하지 못한 것들 또한 있다. 저절로 잊힌 것도, 억지로 잊은 것도 있겠지. 허나 저 입 벌린 구덩이. 저건 못 잊겠는데, 그러니 절대 뒤돌아보지 말자, 재차 다짐해도 되끌려가고 사로잡혀 그 한복판에 내던져질 것만 같은, 그런 기억의 구덩이도 있다.

     

재작년 봄이었던가. 어떤 책을 읽던 끝에 문득 생각했다. 후회는 하지만 반성이나 성찰은 하지 않겠다고. 그건 내가 간신히 빠져나온 특정 시간에 대한 태도였다. 뒤늦은 뉘우침까지야 어쩔 수 없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나만이라도 품어주자, 그런 바람 또한 떨치지 못한 채로, 저만치 떨어져서, 언제든 빠르게 돌아설 수 있도록 비스듬히 빗겨 서 있는 것. 내게 후회란 그런 것이다. 반성이나 성찰은 그렇지 않다. 반드시 그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두루 살피고 작은 것 하나까지 자세히 봐야 한다. 통렬한 깨달음은 그 뒤에야 찾아온다. 그러니 나는 깨닫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 의지였고 결심이었다. 그렇게 잊힌 듯 사는 게 가장 좋지 않으려나, 때로는 적극적인 도망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유약한 마음을 되짚어보게 한 책들이 있었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남편과 J의 격한 우쭈주 속에서 센터에 갔다. 운동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향하던 걸음을 바로 옆 도서관으로 돌렸다. 센터에서 요가나 수영을 배우다말다 하던 시절, 그리고 J가 중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자주 보냈다. 이 작은 도서관은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최적화된 공간으로, J가 동화책을 쌓아두고 읽는 동안 남편은 빈백에 몸을 파묻곤 낮잠을 즐겼고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책을 읽곤 했다. 그게 벌써 음, 6년 전인가, 생각하니 시간의 이토록 성실한 움직임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시간도 나도 나란히 흘러왔을 뿐인데 시간에게서 소중한 것을 갈취당한 채로 떠밀린 것만 같다.


그 나른하고 한가롭던 한때를 떠올리며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밟아 2층으로 조용히 올라갔다.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과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꽂혀 있는 서가를 찾아. 집 근처 도서관에서는 예약대기가 길어 최의 소설은 아마 봄이 끝날 무렵에나 읽게 될 형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을 좋아한 이유 하나는 신간과 인기도서를 경쟁 없이 읽을 수 있어서였다.


2층 창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학생들을 보니 J가 저 시절을 무사히 끝낸 데에 안도하면서도 그리움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제는 J가 매일같이 밟게 될 동선을 따라 셋이서 짧은 캠퍼스 투어도 다녀왔다. 외동딸의 독립이라는 미션을 목전에 두고 나는 곧잘 지나간 시간을 아까워하고 다가올 날들을 염려한다(부녀는 이런 내가 더 걱정이라 하지만). 이런 돌아봄이 나이드는 증거라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마사 누스바움의 <지혜롭게 나이든다는 것> 3장 ‘지난날을 돌아보며’ 편에서 알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과거와 관련된 감정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특히 키케로와 세네카는 60대에 이르러 감정에 관한 철학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 그들 역시 나이든 사람과 회고적 감정을 연결짓지 않았다고. 사적인 기록들과 그리스 로마 비극 작품 속에서도 노인들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지난날을 좀처럼 분석하지 않는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는 감정을 분류하는 데 과거를 유의미한 범주로 받아들이며, 과거와 직접 연관된 감정들이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여긴다.


누스바움은 종교(유대교&기독교), 정신 분석, 그리고 특히 소설이 이런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소설을 통해 과거에 대해 묻는 일의 가치를 배웠고, 회고적 감정들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생활하고 변화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대에 걸쳐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등장인물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와 연관된 다양한 감정들이 대단히 중요해진다. 소설에서는 그런 감정들의 중요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1인칭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활용하기도 한다. 

... 가장 비관적인 소설가는 아마도 마르셀 프루스트일 것이다. 프루스트는 우리의 과거가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될 운명이라고 믿는다(혹은 그런 믿음을 가진 화자에게만 이야기를 맡긴다). 프루스트는 우리가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오래전에 가버린 사람들, 즉 부모나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고 보았다.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을 알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우리 자신의 성격에 대한 서사적 연구(소설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연구)와 회고적 감정들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지침이다.” p148 



이걸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자기 전에 조금씩 읽고 있는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아서 놀라고 있다. 페이지마다 묘사와 잠언의 향연이...) 프루스트는 과거가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되는 운명을 믿는다고 혹은 그렇게 믿는 화자에게만 이야기를 맡긴다고, 그런 점에서 가장 비관적인 소설가라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병렬독서의 장점은 이런 데서 빛난다. 지난 2주간 우연찮게 책 세 권과 함께했는데 각자의 이야기로 서로를 떠받치는 것만 같았다. 하나의 주제로 독서가 모아지고 풍성해지는 경험이었다. 주제라 하면 반추와 회고적 감정일 것이다. 과거와 관련된 행복하고도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반추와 성찰이라는 회고적 과업에 종속돼 있다. 허나 현재 삶의 과업을 목적으로 할 때 제 가치를 찾는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재발견하고, 무작위적으로 흩어진 듯한 조각들을 모아 의미 있는 자기서사를 구축하는 것, 온전한 미래를 희망하는 것.


권여선 작가의 <각각의 계절>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첫번째 수록작 <사슴벌레식 문답>이 세 번의 문답을 통해 통렬한 자기발견으로 나아간다면, 마지막 수록작 <기억의 왈츠>는 뒤늦은 깨달음과 회한에서 멈추지 않고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희망한다. 전자에서는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종속되어 있지만, 후자에서는 과거를 통해 현재가 새로운 미래로 향한다.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고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화자의 마지막 고백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가 시간의 구덩이로 되돌아가는 일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 괴로움을 다시 맛보는 게 아니라,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발견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 시절을 뒤로한 채 미래로 향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이미 오래전 알지 못하는 어느 경로로 잘못 들어가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그랗게 갇혀버렸는지도" 모르는데... 먼훗날 지금 이 시기를 떠올리며 또 다른 후회에 사로잡히는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를 기억하는 듯한 겹기억"의 순간들이 내게도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겹기억을 견디며 사는 게 인생일지 모른다. 다만 다른 방향으로 한발짝이라도 내딛는 용기, 딱 그만큼의 변화에 불과할지라도, 그런 용기로 인한 변화가 현재의 나를 다른 미래로 이끌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마지막 단편 <기억의 왈츠>를 읽으면서,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안도하면서, 내 유약한 마음을 다독이며 한번 돌아가보자고 거기 웅크린 자신을 발견한다면 꺼내주자고 다짐해보며 말이다. 


등장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각각의 계절마다 새로운 힘이 필요할 터이며, 제대로 돌아보는 힘이 필요한 계절 또한 반드시 찾아온다. 진득하고 냉정하게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힘, 그곳에 갇힌 자신을 발굴해내는 힘 말이다.


미래의 내가 회한의 바다로 침몰하지 않기를, 깨달음이 나를 미래의 빛을 향해 떠밀어주기를, 절룩거리는 걸음으로라도 기억의 왈츠를 출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삼십 년 전의 그 여행을 오로지 즐거웠던 추억으로만 채색하려 애써왔다. 그러나 기차가 사라진 기차여행처럼, 나의 기억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터널 끝 원환처럼 비현실적으로 밝게 동동 떠 있다. 그렇게 내 기억은 이미 오래전 알지 못하는 어느 경로로 잘못 들어가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그랗게 갇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 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처럼.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 <사슴벌레식 문답>의 끝, p42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꼬박 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숲속 식당의 마당에 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을 권하듯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 테고 우리는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돌아갈 것이다. 공중에서 거미들이 내려와 왈츠의 리듬에 맞춰 은빛 거미줄을 주렴처럼 드리울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 <기억의 왈츠>의 끝,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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