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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08. 2024

25. 마음이 선듯 나아가지 못할 때

소설가 이상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읽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로 시작하는 기나긴 회상이랄지 몽상이랄지 이 유명한 첫 장면을 도대체 몇 번이나 나는 읽어온 것인지.


주인공이 잠에서 깰 듯 말 듯 선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는 순간마다 그간 머물던 방들이 궁극의 디테일을 선보이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당연히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또한 이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이 책과 관련된 기억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고, 대부분은 잠들기 직전 침대 헤드에 기대 읽던 밤의 기억들이다.


이렇게 오후의 햇빛이 기세좋게 등을 덥히는 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 덩어리로 엉겨 달려드는 듯한 공간에서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엉뚱한 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양 어색하고 생경한 느낌이 든다.




며칠 전 나는 난생처음으로 새해맞이 독서계획이라는 것을 세워보았다. 내 독서행위는, 애정하는 작가의 신간을 읽고, 그들의 책이 인도하는 또 다른 책을, 그리고 우연히 얻어걸린 책이라든지 믿을만한 이들의 추천으로 기대감이 높아진 책 들을 연쇄적으로 읽어오는 식이었다.


매일의 일에 굳이 목표가 필요한가, 계획은 중요하지, 설렘은 포기해야겠지만... 따위의 생각은 아마도 나와 같은 극단적 P형들이나 하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올해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마련했다.


나는 해가 바뀐 기념으로 스케쥴러 대신에 스케치북을 사고, 줄이 빽빽하게 그어진 유선노트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막혀 와 백지 노트를 편애한다. 이런 인간이 계획이라는 정연하고 반듯한 질서의 세계로 기꺼이 자신을 몰아넣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때는 생기 넘치고 싱그러운 종이 향을 풍기던 새 책들이 시간 속에서 누렇게 삭고 있기 때문이다.


내 책장 밖에서나 안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왔으며 앞으로도 한세월 거뜬히 견뎌낼 가치 있는 책들이, 그렇게, 방치된 채로.


새해의 첫 독서를 위해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문득 그 사실이 나를 후려쳤다.


김영하 작가가 말했던가.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 읽는 것이라고. 그러니 오래 미뤄왔던 벽돌책들을 완독해보자! 작심삼일을 매주 거듭하는 한이 있더라도!


올해는 프루스트의 초장편소설을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간 모은 건 4권이라 앞으로 9권을 더 모아야...그걸 깨닫자마자 결심이 바로 흔들렸지만... 나는 책을 꺼내들었다. 익숙한 첫 페이지, 첫 장면, 첫 문장.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 그러자 추억이, 현재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내가 살았던 곳, 혹은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한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도저히 내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사실상 독서는 이미 오래 전 시작되었고 이제 끝날 일만 남은 것이다.


시작은 이미 지나쳤다.  




프루스트의 책이 새해 첫 책은 아니다. 1월 1일, 나는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 서울, 도쿄, 베를린, 세 도시발 교차 일기>를 읽었다.


서로를 향한 서신이 연결을 의도함 없이 이어지고, 세 작가의 교환서신이라지만 대상이 특정화되지 않은 채 자유로이 쓰인 기록들이며, 사이사이 여러 지인들의 단상까지 담고 있어 책의 시공간이 보다 넓어진다. 기획도 구성도 흥미롭고 세 작가 모두 개성이 남달라서 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같은 작가들로 동일한 컨셉의 후속편이 나온다면 아주 반가울 것 같다. 박솔뫼, 이상우 작가의 글은 독보적인 문체 때문에 원래부터 좋아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소득은 안은별 작가의 발견. 


책은 작년에 일독했다. 2023 최애 글이 바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짧은 글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주제와 내용, 문체와 분위기, 글이 쓰인 타이밍마저)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다. 새해 첫날 다시 읽어야겠다고 작년부터 생각해왔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는데, 시작하기 전 특유의 압박으로 마음이 나아가지 못할 때, ‘시작’은 네가 의식하지 않은 시간 속 우연한 장소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그러니 그냥 하라고, “굳이 다른 이에게 보여지겠다는 마음” 없이 그 순간을 가벼이 지나치라고 내게 말해주고 싶을 때,


앞으로도 나는 이 문장을 도움닫기로 삼을 것이다.



“...웬일로 뭔가 즐거운 일이 떠올라 그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시작도 지나치는 게 좋다.”

- 이상우, Charles Lloyd Quartet- <Caroline No> (Live at Jazz a Porquerolles 2011), p22



https://www.nicovideo.jp/watch/sm1593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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