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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l 01. 2024

그 사이 어디쯤, 다만 걷는 중이라고

최진영, <겨울방학>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 서랍 속에는 최진영 소설들이 적힌 색인카드가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작가의 데뷔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읽은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썸머의 마술과학'까지. 작가가 창조해낸 목소리가 좋았다. 당돌하고, 부당함과 부조리를 못참고, 까칠하고 냉랭하게 구는데도 꼭 껴안아주고 싶은, 여린 마음과 냉소가 공존하는, 하지만 이상하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들('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사랑스럽다).


이 목소리가 망한 세상이나 망가진 삶, 망쳐버린 관계들을 들려줄 때조차, 다른 작가가 동일한 주제로 쓴 이야기를 읽을 때처럼 내 마음이 아주 어둑해지지 않는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숨이 턱턱 막혀올지라도 그들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영영 닳지 않을 심지가 느껴지는데, 이런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라면 울면서도 끝까지 걸어가겠지.


최진영 작가의 두번째 단편집 <겨울방학> 속에도 그런 인물들이 있었다.  



<오늘의 커피>


작가의 냉정함에 혀를 내두르게 하는 소설이 있다. 자신이 만든 인물을 무자비하게 굴려대는데, 하필 필력도 뛰어나 이야기 몰입도도 최상인데다가 그 인물에 마음을 모조리 내어준 처지라면 나 또한 작가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왕좌의 게임 작가가 이 분야 갑 아니었나. 다음 시즌에는 또 누가 죽어나가나 심장이 쫄렸다. 찐덕들은 엔딩 나기 전에 작가님이 돌아가실까 봐 떨었다지만 여하튼...) 작가를 원망하면서도 끝까지 볼 수밖에 없다.


반면 인물을 향한 작가의 애틋함이 느껴지는 소설도 있다.


가령, 이런 인물이 있다. 세상이 불행을 깡그리 몰아준 듯한 인물이다. 장애를 갖고 태어나 성장기 내내 재활하여 겨우 걷게 되었다. 하지만 절룩이는 걸음새 탓에 변변한 일자리 하나 구하기 쉽지 않다. 같은 시간제 아르바이트생에게서도 무시받기 일쑤다. 아버지는 사기꾼 도주자이며, 아버지의 빚을 갚느라 고생하다 어머니 마저 사고를 당했다. 편의점, 공장, 식당과 카페 알바 등등을 전전하며 학자금대출과 월세와 요양원 비용까지 감당해야 한다. 종교는 없다. 나쁜 기적을 빌게 될까 봐. 불행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저 “자기 앞의 독촉을 해치우는 일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어머니의 자살로 차마 그려보지 못한 끝에 도달했으나, 어머니를 외로움 속에 방치했다는 죄의식을 버릴 수 없으므로 그건 또 다른 나쁜 끝에 불과할 뿐, 그가 기다리는 진정한 끝이 아니다. 원하는 끝이 아니므로 새로운 시작도 없으며, 그저 그 사이 어디쯤에 그의 시간은 멈춰 있다.


수록작 <오늘의 커피> 속 이야기다.


주인공 조가 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조의 인생처럼 그날의 짧은 여정 또한 만만치 않다. “‘stop’도 ‘start’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인 곳을 막연하게 그려보지만, 절룩이며 고되게 걷는 길의 끝에서 무엇이 또 그를 좌절시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작가가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속에 주인공을 무자비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하는, 그를 어딘가로 꼭 데려다 놓을 거라는 바람을 버릴 수 없었다. 혹은 믿음. 그 믿음이 이뤄진다면, 그는 어떤 곳에 도달해야만 할까. 그곳은, 내내 마음 조리며 이 단편을 읽은 내게도 안식을 줄 수 있는 곳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작가님, 이런 결말을 주셔서 감사해요.  


“다만 걷는 중이라고, 조는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정거장에 내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 중이라고. ‘stop’도 ‘start’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만 않으면 괜찮다. 걷고 걸어 도착한 그곳에 허허벌판만 펼쳐져 있더라도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경고도 반가움도 담기지 않은 심심한 소리였다.
걷다 보면 보인다고 했다.
조는 묵묵히 걸었다.” pp.242-243



<의자>


이번 단편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소설은 '의자'였다. 한편의 단편영화를 본 것만 같다. 영화 같지만 소설로 쓰여져서 더 좋은 이야기랄까.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이 소설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단편이 너무 좋아서 두 번 내리 읽었고, 그날밤 잠자리에서 마치 영화를 보고난 뒤처럼 잔영으로 남은 몇몇 장면들을 떠올려보았다. 주인공이 할머니의 관을 짜고 일인용 의자를 만드는 장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전거로 내달리는 장면과 자판기 앞에서 소진과 커피를 마시는 장면들, 그 장면마다 스며들어 있는 마음들을 더듬어보았다. 이건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골똘하였으나 어떤 마음들은 그냥이라는 말로도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그냥 좋았던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내가 먼저 소진을 알아봤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는 계절이 생겼고, 자판기의 밀크커피가 특별해졌으며, 머지않아 의자도 하나 생길 터였다. 내가 먼저 소진을 부르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열다섯살 그 새벽부터 소진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 내 방향을 틀었다. 가던 길을 멈추게 했고, 돌아서게 했고,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그리로 발을 떼게 만들었다. 내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연애할 때 많은 사랑의 말은 나를 지키게 했다. 사랑은 그것 그대로 있을 텐데 때로는 내가 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난 아직도 그 방법을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p165



<가족>


도대체 가족이란 뭘까. 이 무구한 질문에 수호의 입을 빌려 작가는 씁쓸하고도 사랑스러운 대답을 들려준다. 새로운 가족 앞에 놓인 미래를 밤의 고속도로에 빗댄 듯한 결말이  인상적이다. 특히 이야기를 끝맺는 말이 정말 좋았다. ‘믿었다’가 아니라 ‘믿고 싶었다’라니... 이 단어의 선택으로 이야기의 무게가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밤의 고속도로는 검고 위험하고 아름다웠다. 따뜻하게 빛나는 가로등이 가까워지고 멀어졌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면서, 서로의 손을 매만지면서, 두 사람은 자기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p138     



<돌담>


블라인드에서 성토할 법한 가족 같은 회사에서 모욕과 환멸을 쌓으며 버텼던 ‘나’는 결국 내부고발자가 되어 쫓기듯 퇴사하곤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열두살 적 단짝친구 장미네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을 엄마로부터 전해듣고 장미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포장하는 자본의 논리, 당장의 생존을 위해 그 기만에 동조하는 이들, 그로 인해 부서진 이들이 세상과 단절하려 쌓은 돌담을 ‘나’는 바라본다. 자신이 잊고자 했던 마음들을 되짚어보면서. 사랑하는 친구에게 저질렀던 잘못, 그걸 면피하고자 뱉은 거짓말, 죄책감, 수치심,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돌 하나를 쌓고 그 위에 얹을 또 다른 돌을 찾으며 길을 걷는 마음을.      


<가족>이 어떤 질문에 답하는 이야기라면, <돌담>은 질문을 품은 이야기였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는 어떤 어른으로 살고 있나, 나도 이런 돌담들을 쌓아본 적이 있지 않나, 그렇게 자문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소설에는 세 번의 돌담쌓기가 나온다. 그 행위가 갖는 각각의 의미들을 헤아리며 이야기를 읽었다.  

    

하나는 은퇴한 선생이 공허함을 못이기고 쌓는 돌담이다. 이 돌담에 관해 엄마와 화자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담을 다 쌓은 뒤에도 허전한 마음은 어쩌냐고 묻자 엄마가 답하길, “그런 걸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고,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한 거지. 그러다 보면 이것저것 섞여서 본래 마음에 가까워지는 거지.” 본래 마음이란, 바다 같은 것, 온갖 생물들이 다 같이 섞인 상태, 무엇으로든 채워져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돌담 그 자체보다는 쌓는 행위가 의미를 갖는다. 비어 있는 마음을 어떻게든 채워보려는 몸짓인 것이다.


두번째 돌담은 장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노인)가 쌓는 것으로, 돌담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그를 상처 입힌 이웃들로부터, 비극을 안겨준 바깥세상으로부터 단절하고자 쌓는 돌담이다. 그걸 바라보는 이웃들의 심경 또한 단순하지 않다. 죄책감, 걱정, 어쩌면 자신이 겪었을지 모를 비극에서 눈 돌리고 싶은 불편한 마음. 어떤 이웃들은 하나둘씩 돌을 두고 가고, 돌담은 점점 길어진다. 이런 돌담은 단절과 거리두기를 위한 것이다. 죄책감(어쩌면 그 비극을 초래한 데 자신의 몫도 있기에 노인 스스로도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과 누군가의 상처 받은 마음, 그리고 모른 척하고 싶은 자신의 거짓된 마음으로부터.


세 번째 돌담은 주인공이 쌓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지키는 돌담이라 생각했다. “나쁜 것을 나누며 먹고 사는” 일로부터, 거짓말하고 부끄러워 눈감고 도망치는 일로부터 말이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그건 괜찮지 않고 심지어 나쁘다고 소리 내어 말하기 위해, 그런 고발이 어리석다고 외치는 세상과 더는 뒤섞이지 않도록. 나쁜 세상의 살이 되지 않고, 종내는 내뱉어지고 말 “입 속의 뼈” 같은 존재가 되어. 주인공은 이제 돌 하나를 막 쌓았다.      


“한때 나는 장미의 동생이고 싶었다. 장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 아이.
눈보라가 몰아쳤다.
돌을 찾으며 길을 걸었다.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p43     



<첫사랑>


읽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애기들, 정말 사랑스럽)...


“어떤 첫사랑은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악몽이지만 어떤 첫사랑은 가장 이르게 빛나는 샛별처럼 그곳에서 인생보다 더 긴 시간 반짝인다.” 100


<겨울방학>


이나는 아홉살때 엄마가 산후조리하는 한달 간 고모와 지낸 적이 있다. 고모에게나 이나에게나 겨울방학이었던 그때, 그들은 무엇을 주고받았을까. 고모는 의식하지 않았고 이나는 무지하여 몰랐던, 가난한 삶의 면면이었을까. 고모 스스로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만들어준 추억이었을까, 아니면 고모 자신에게도 방학 같던 휴식이었을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마음이었을까.


내게도 어린 시절 고모가 가르쳐준 마음이 있다. 고모가 했던 말을 “가끔 허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그럴 때면 그 시절과 그런 말을 하던 고모를 떠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오롯이 내가 당면한 현실과 나만을 생각한다. 그렇게 내 말이 된 고모의 말이 있다.


“이제 어른인 이나는 (...) 가끔 허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거짓말 아니야. 정말 이 정도면 충분해.
이나는 고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나는 여전히, 자기의 그런 마음을 고모가 전혀 모르길 바란다.” p75  


<囚>


‘나’는 19세기 러시아 지하생활자처럼 세상에 섭슬리길 거부하곤 자신을 가뒀다. 팀장은 매일같이 전화해선 더 늦기 전에 나오라고 성화이지만, 나가 봤자 더 큰 불행이 있는 문밖 세상으로, 나는 나갈 수도 나가고 싶지도 않다. 내게는 “저곳 역시 나가야 할 곳”이다.


나도 주인공의 독백 속에 갇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최진영식 냉소가 빛나는 소설.


“내게서 무관해지고 싶었다.” 177



<어느 날(feat. 돌멩이)>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카드 연체는 막아야 하며 쓰던 소설은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주인공이 결국 집을 떠나 향하는 곳은... 맞다, 거기다.  


<막차>


승지와 장과 남은 언제나처럼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중이다. 돌연 버스가 무언가를 친 듯한 느낌에 장과 남은 뺑소니냐 아니냐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 것이냐를 두고 말다툼을 벌이고, 승지는 버스가 막 급정거를 한 사고다발구역에서 언젠가 (아마도 뺑소니) 사고를 당한 영지를 떠올린다.


<돌담>과 나란히 읽으면 좋을 단편.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지구는 망해가고 있고, 우리는 그 길로 가는 막차를 탄 게 아닐까.


“승지는 죄책감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죄책감보다 더 타당한 단어를 찾아내고 싶었다. 분명 있을 텐데 자기가 모르거나, 분명 있는데도 사람들이 외면해서 만들어 내지 않은 단어를. 죄책감이 타당하다면 그다음 단어를 찾아내고 싶었다. 죄책감 다음에 오는 단어. 그다음을 몰라서 승지는 계속 거기에 머물러야 했다.”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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