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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n 24. 2024

도끼 같은 글쓰기

엘렌 식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문학은 사리 분별을 넘어설 정도로 타인의 의견에 신경 쓴 사람들이
파멸한 잔해로 온통 뒤덮여 있습니다.”
- <자기만의 방>, p98



0.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데 어떤 마음 상태가 가장 적합한가.”


버지니아 울프는 작품 내외로 개인의 삶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를 예로 들며 이 물음에 대답한다. 작가 자신의 욕구는 방해물이며 이물질이라고, 작가를 상기시키는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애야 한다고, 그리하여 작가가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한 작품이 완전히, 자유로이 드러나야 한다고. 


작가 ‘자신’에게조차 방해받지 않고 작열하는 마음 상태. 이 또한 ‘죽음’의 한 형태가 아닐까.  엘렌 식수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망자의 학교’편을 읽으며 생각했다. 근래 읽은 책 중 난이도 최강이었다.


“(글쓰기를, 삶을) 시작하려면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p19



1. 책의 시작은 이렇다. “글쓰기 학교에 가봅시다.” 식수의 글쓰기 학교는 ‘망자, 꿈, 뿌리의 학교’로 이뤄져 있다. 이곳에서 글쓰기 기술에 입문해보자고 식수는 운을 떼지만, 그보다 나는 ‘창작하는 데 필요한 마음 상태’를 (차마 배웠다고는 못하겠고 슬쩍) 엿보았다. 식수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들의 글쓰기를 통해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잉에보르크 바흐만, 토마스 베른하르트, 마리나 츠베타예바, 카프카, 장 주네. 이 책은 이들 작가의 창작론, 혹은 문학 비평 수업처럼도 보인다(실제 미국에서의 비평이론강의를 바탕으로 했다는데, 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주제를 책이 아니라 강의로 접했다면 거의 소화하지 못했으리라 확신..).


식수는 세 단계에 걸쳐 자신의 영웅들이 무엇을 성취해냈는지 설명하고 그들이 도달한 곳으로 가보자며 우리를 독려한다. 그곳은 “자신에 맞서, 정신적, 감정적, 전기적 클리셰의 축적에 맞서”야 하는 투쟁의 공간이며, 외부와 내부의 경계들을 넘어서야 하는 도전의 공간이다.


“우리는 아직 낙원을 되찾지 못한 이들이며, 우리가 아직 낙원을 되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 악덕, 즉 게으름과 조바심을 앓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으며, 게으름과 조바심으로 인한 서두름 탓에 제자리에 멈추고 맙니다.”

“글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글쓰기에 헌신한다는 건 파는 일, 파헤치는 일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고, 여기에는 오랜 수습 기간이 수반됩니다.”

“글쓰기의 첫 번째 순간은 망자의 학교이고, 두 번째 순간은 꿈의 학교입니다. 가장 심화된 순간이면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세번째 순간은 뿌리의 학교입니다.” p18     



2. 제목에서도 쓰인 ‘사다리’는 핵심적인 비유다. 상승이 아니라 하강을 위한 사다리로서, 가장 낮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실(비밀)을 향한다. 글자 H는 이편과 저편을 글이라는 통로로 잇는 사다리를 표상하는데, 불어로는 도끼hache와 발음이 같다고. 카프카의 도끼처럼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고 종내는 우리를 죽이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그렇게 식수는 글쓰기 사다리의 첫번째 계단인 ‘죽음’으로, 이른바 ‘망자의 학교’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곳에서 식수가 알려주는 건 (위대한) 글쓰기에 필연적인, 물리적이면서도 관념적인 죽음이다. 내게 절대적 영향을 끼친 망자죽음이며,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해체를 뜻하는 나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역설적이지만 새로운 삶으로 이어진다. “공인된 보편적인 망상”을 떨쳐내고 용감하게 글을 쓰는 삶이다. 식수의 인생작가들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았다. "자신을 경험과 사고와 생의 극단으로" 몰고갔고, 마치 글쓰기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라도 하듯, 혹은 그런 글쓰기의 종착지는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듯, 생을 마감했다.  


'나(삶)'를 해치는 글쓰기라니 무자비하다. 극소수의 위대한 작가들이 아닌 이상 불가능해보인다.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길이 하나 더 있다. 죽음과 접점을 지녔으나 덜 파괴적인 길이다. 바로 '꿈'이다. 이제 식수는 ‘꿈’의 학교로 우리를 이끈다. 


‘죽음’과 ‘뿌리’ 수업은 주제와 분석 텍스트, 설명 방식 모두 난해하여 힘들게 읽었다. 도전적/도발적이라 묘하게 홀리기도 했지만. 반면 ‘꿈’의 수업은 굉장히 흥미로웠고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바가 많았다. 


의식적으로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꿈에서는 얼마나 쉬운지. 눈만 감으면 바로 국경을 넘어 이국의 땅에 와 있지 않은가. 일상의 자아를 훌훌 벗어던지고, 우리를 가르치고 짓눌러온 기존세계로부터 순식간에 자유로워진다. 내가 나로부터 숨긴 비밀(그건 진실일까)을 향해 한층 더 가까워진다. 꿈이 저 알아서 흘러가듯이 글도 스스로 흘러가도록 놔두자. 내 의식이 제 한계를 드러내며 떠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꿈, 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 랭보는 꿈에 탑승하여 글을 썼으며, 카프카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다. 하루키는 의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라 했지.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된 혼돈'은 바로 거기에 있다면서.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의 소설은 무의식의 공간에서 쓰여진다고. 


“누가 나를 죽이는가? 나는 어느 살인자에게 나를 내맡기고 있는가?’ 모든 위대한 글은 이 질문에 사로잡힌 포로입니다.” p32

“사랑과 도끼는 불가분의 관계이죠.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우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죽입니다. 이런 것을 살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꿈만이 이런 것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p164

"이것이 글쓰기의 정체입니다. 시작하기죠. 행동과 인내와 관련이 있습니다. 꼭 목적지에 닿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글쓰기는 도착하기가 아니니까요. 대체로는 도착하지 않기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걸어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도착하지 않아야 할까요, 얼마나 멀리 방랑하며 신발을 닳게 하고 즐거워해야 할까요? 우리는 밤만큼 멀리 걸어야 합니다. 각자의 밤만큼 멀리요. 자아를 뚫고 어둠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p116”


3. 엘렌 식수와 그가 주창한 ‘여성적 글쓰기’가 궁금하여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떠올랐다. “여성으로서, 그러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여성으로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것,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며 “의식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쓰인 것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 울프의 주장을 '순전한 여성(남성)'이 아니라 '순전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당시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의 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연 누가?


이에 대한 식수만의 아주 특별한 대답을 들은 것 같다. (자신을 포함한) 기존 세계를 파괴하고 전복하는 것으로 본질과 극단에 이르렀던 작가들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정의된 이름들을 떨치고, 심지어 종種과 성性의 경계를 넘어, '순전한 자신'을 넘어서 '원초적인 자신'에 다다르고자 했던.


장 주네의 글쓰기와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대비시킨 3장 <뿌리의 학교>편에서는 분석 자체에 감탄만 나왔다. 내 부족한 언어로는 이 놀라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두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 사회적 위계를 허물기 위해 계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가장 더럽고 열등하다 여겨지는 존재를 가장 높은 데로 이끌려는 욕망(주네)과 온갖 금기와 혐오를 뚫고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원시적 생명력(어쩌면 뿌리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려는 욕망(리스펙토르)의 대비...

 작가와 이들 언어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었다면 문장을 쪼개어 단어까지 파고드는 식수의 분석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내 미천한 지식과 얕은 이해로도 식수의 글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알겠다. 분석은 엄밀하며 언어는 시적이고 비평은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다.


어떤 비평은 그 자체로 별도의 작품 같다. 비평에 쓰인 언어까지 특별해서. 어떤 작품에 놀라고, 비평에 다시 놀라고, 작품에 새롭게 놀라는 일이 그래서 벌어지겠지.


4. 글쓰기에 일생을 건 이들이라면 카프카의 도끼 같은 작가들이 반드시 있어야겠지.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전범으로 삼아야 하는 작가들 말이다. 이를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5. 식수의 학교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다. 애초에 그건 굳게 닫힌 문만 같다. 애써 열었다 해도 그곳으로 선뜻 들어설 수 있을까. 세상의 관점과 자신도 모르게 쌓아온 경험들에 맞서 투쟁하는 공간으로? 겹겹이 둘러싼 경계들을 넘어서야 하는 도전의 공간으로? 자신에게조차 숨겨진 비밀들을 향해? 하지만 누군가는 태생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되겠지. 이런 생각 끝에 떠오른 이들이 있었다.


#이제니 #시인 #에세이 #새벽과음악 #말들의흐름시리즈 #시간의흐름


이제니 시인이 <새벽과음악>에서 이야기한 이들이라면, 아마도.


“글쓰기에 미쳐 있고, 당연히 책 읽기에도 미쳐 있으며, 예민하고 영민하며, 깊은 사유로 벼려낸 문장들과 예술작품에 깊이 이끌리는 기질을 타고났으며, 극단적인 아름다움에 다가가려고 하고, 그 자신 역시 고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그러나 자신과 자신 사이에는 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실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각자의 글쓰기-읽기를 통해 간신히 간신히 그러나 강하게 강하게 버텨나가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책이 가리키는 쪽으로 용감하게 발을 내딛을지 모르겠다.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저자소개: <밤의책>



“모두가 읽기를 같은 방식으로 수행하지는 않지만, 글쓰기와 유사한 읽기 방식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세계를 삭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책으로 세계를 소멸시킵니다. 여러분은 알면서, 또는 모르면서, 펼친 책을 집지만, 그 책이 단절의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책의 문을 열자마자 다른 세계로 들어가서는 이 세계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립니다. 읽기는 백주의 도피이고, 타인에 대한 거부입니다. 대체로 읽기는 고독한 행위이며, 그 점에서는 글쓰기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닙니다. 더는 읽지 않기 때문이죠. 어릴 때는 자주 읽었고, 읽기가 얼마나 격렬할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p41

"생각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건 애쓸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기는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 애쓰는 일이고, 글쓰기는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을 쓰는 일입니다.” p74

“글을 쓰도록 우리를 강제하는 것이 ‘고백 성향’, 고백 욕망, 고백의 맛을 맛보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고백하고 싶은 욕구와 그 불가능성 둘 다죠. 대체로는 우리가 고백하는 순간 속죄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고백, 그리고 건망증이라는 함정이죠. 고백은 최악의 것입니다. 고백은 자신이 시인한 것을 부인합니다.” p86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생의 모두를 속였다고 말하는 시간이 언제쯤 올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조금이라도 듣기 위해 망자의 학교에 갑니다. 그래서 우리를 해치는 책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우리는 카프카가 <가사 상태에 관하여>라고 제목 붙인 구절에서 묘사한 상황에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쪽으로 가는 경험을, 시나이산의 모세를, 분명히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 글쓰기는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데 성공할지도 모르는, 정밀하고 까다롭고 위험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저의 욕망입니다.

(...) 제가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클라리시가 꿈꾸듯이 죽음과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위해, 저는 다른 학교, 제일 가까운 학교, 망자의 학교와 제일 비슷한 학교로 갑니다. 바로 꿈의 학교입니다.” pp99-100     
“우리가 꿈꿀 때 익숙해지는 것이 ‘비밀의 느낌’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꿈꾸는 것을 즐기는 동시에 두려워하게 됩니다. 꿈에 들렸을 때, 꿈의 주민일 때, 여러분은 그 비밀의 느낌, 그 일종의 박동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한번도 얘기되지 않은 어떤 것, 그 누구에 의해서도 얘기되지 않을 어떤 것, 그리고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소유합니다. 여러분을 꿈꾸고 또 쓰게 만드는 것은 비밀을 알 가능성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고동치는 비밀의 존재감, 비밀의 느낌 말입니다.” p151     

“꿈은 어딘가 먼 곳에 숨은 보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글쓰기가 그 보물을 얻으러 가는 수단이라는 걸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이미 알다시피 보물은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p156     
“우리는 우리 자신에 맞서, 정신적, 감정적, 전기적 클리셰의 축적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글쓰기의 일반적 추세는 거대한 클리셰의 결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묘한 적들에 맞서 싸워야 하는 전투입니다.” 208

“독서는 사악하다고 일컬어지는 모든 종류의 기쁨에 대한 놀라운 은유입니다.” 209

“등가물 선상에 이런 것들이 있게 됩니다. 유대인, 여성, 흑인, 새, 시인, 등등, 이들 모두가 배제되고 추방되었습니다. 추방은 곤란한 상황이지만, 한편으로는 매혹적인 상황이기도 합니다. 추방의 경험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게 견딜 수 있습니다. 어떤 추방자는 분노로 죽고, 어떤 추방자는 추방을 하나의 나라로 바꿉니다.”  210
“몰두하는 저자는 반드시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경계를, 자신의 월경越境을, 자신의 변화를 질문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성인지만이 아니라 어느 성으로인지, 다른 하나와 어떤 관계에서인지, 어떤 다른 하나인지, 다른 하나의 성은 무엇인지도 궁금해하게 됩니다.”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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