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겨울방학>
“다만 걷는 중이라고, 조는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정거장에 내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 중이라고. ‘stop’도 ‘start’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만 않으면 괜찮다. 걷고 걸어 도착한 그곳에 허허벌판만 펼쳐져 있더라도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경고도 반가움도 담기지 않은 심심한 소리였다.
걷다 보면 보인다고 했다.
조는 묵묵히 걸었다.” pp.242-243
“내가 먼저 소진을 알아봤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는 계절이 생겼고, 자판기의 밀크커피가 특별해졌으며, 머지않아 의자도 하나 생길 터였다. 내가 먼저 소진을 부르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열다섯살 그 새벽부터 소진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 내 방향을 틀었다. 가던 길을 멈추게 했고, 돌아서게 했고,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그리로 발을 떼게 만들었다. 내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연애할 때 많은 사랑의 말은 나를 지키게 했다. 사랑은 그것 그대로 있을 텐데 때로는 내가 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난 아직도 그 방법을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p165
밤의 고속도로는 검고 위험하고 아름다웠다. 따뜻하게 빛나는 가로등이 가까워지고 멀어졌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면서, 서로의 손을 매만지면서, 두 사람은 자기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p138
“한때 나는 장미의 동생이고 싶었다. 장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 아이.
눈보라가 몰아쳤다.
돌을 찾으며 길을 걸었다.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p43
“어떤 첫사랑은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악몽이지만 어떤 첫사랑은 가장 이르게 빛나는 샛별처럼 그곳에서 인생보다 더 긴 시간 반짝인다.” 100
“이제 어른인 이나는 (...) 가끔 허공을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거짓말 아니야. 정말 이 정도면 충분해.
이나는 고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나는 여전히, 자기의 그런 마음을 고모가 전혀 모르길 바란다.” p75
“내게서 무관해지고 싶었다.” 177
“승지는 죄책감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죄책감보다 더 타당한 단어를 찾아내고 싶었다. 분명 있을 텐데 자기가 모르거나, 분명 있는데도 사람들이 외면해서 만들어 내지 않은 단어를. 죄책감이 타당하다면 그다음 단어를 찾아내고 싶었다. 죄책감 다음에 오는 단어. 그다음을 몰라서 승지는 계속 거기에 머물러야 했다.”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