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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y 21. 2024

27.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울 때

  소설가 정영수의 '미래의 조각' 



<2024 현대문학상 수상 수설집> 은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독서를 끝냈다. 수록작 모두 좋았다. 정영수 작가의 소설은 첫번째 소설집 <애호가들> 이후로 처음인 듯했는데 찾아보니 두번째 소설집 <내일의 연인들>까지 읽은 뒤였다. 소설 대부분을 따라 읽은 셈인가. 이전 단편들이 세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올해 수상작 <미래의 조각>은 그 가운데 가장 좋았다고 단언하고 싶을만큼 좋았다. 이전 소설들을 떠올려보면 인상적인 특정 장면(가령, 정체 모를 시체를 이유도 모른 채 파묻곤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구덩이를 바라본다든가 자연사박물관에서 멸종동물의 거대한 뼈대를 쳐다보는 장면 등)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이 단편은 이야기를 이루는 살과 뼈, 그 세부와 표정까지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오랜만에 이 단편을 읽던 중에 잊고 있던 감각을 기억해냈다. 그래, 나는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소설을 좋아했지, 그래서 이 작가의 소설을 꾸준히 읽어왔나 보다. 


제주에서 보낸 첫 며칠은 강연 준비로 책을 꺼내들 수도 없었고, 그 뒤로는 혼자 있을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과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았다. 남주의 할아버지가 여주의 엄마랑 썸을 타다 버림받아 죽었다고?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면 어머니가 설명 끝에 아침/ 주말 드라마의 인물 관계를 섞어버려 아버지의 핀잔을 받기도 하고, 아버지가 여차저차 그간의 사연을 목청 높여 떠들면 어머니가 "허이고, 잘도 똑똑허네!" 그러곤 배 한조각을 잘라 아버지 입 속에 들이밀고는 했다.


오랜 친구 s를 만난 날에는 온종일 흐리더니 그녀와 헤어질 무렵부터 빗방울이 토닥토닥 떨어졌다. 허한 마음에 부러 s의 팔짱을 끼고 몸을 바짝 붙여 걸었다. 그녀의 검지에는 아버지가 준 금반지가, 새끼손가락에는 자식의 복을 돋워준다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를 핑계로 s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길쭉하고 튼튼하고 따뜻한 손. 학창시절에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다닌 기억이 없다. 나도 그녀도 곰살맞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다. 열에 한번 팔짱을 꼈다면 예나 지금이나 그건 나일 것이다. S가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은 <알로하 나의 엄마들>. “난 파친코보다 이 책이 더 좋더라고. 너도 읽어봐.” 이 책의 무엇이 S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궁금해서라도 언젠가는 들춰보게 되겠지. 그리고 그것으로 S를 떠올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빗줄기가 거세지더니 집에 도착할 즈음엔 쏟아붓듯 했다. 전날의 무더위가 무색하리만치 서늘한 밤비였다. 강연을 끝마치고 교육원 건물을 나서자 쏟아지던 햇볕은 초여름을 방불케 했는데, 그 뒤로 날이 흐리다 개기를 반복했다. 남동생은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가 제주의 날씨라 했고(잠시 뒤 혀를 차며) 이렇게 이른 무더위는 이상기후라고도 했다. 어둑한 골목길에 간신히 주차하곤 퍼붓듯 쏟아지는 비를 한참 바라보았다. 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제 곧 간다고, 다행히 동산 비탈길에 주차할 데가 있었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차창 밖으로 아버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나는 표정을 바꾸고 차문을 열고 나왔다. 비는 그새 기세가 꺾여 있었다. 아버지는 마침 저녁 모임으로 귀가가 늦었던 어머니가 당신의 차를 어떻게 주차해놓았는지 확인차 나왔다고 하셨지만, 어쩌면 전화를 끊고도 오지 않던 내가 이상하게 생각되어 나오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이었던가, 그다음날 밤이었던가.


어머니가 미래를 의심치 말고 믿으라 했다. 자신은 믿는다는 말로 이어졌고, 그러니 너도 믿으라고. 내 어머니가 지닌 이토록 강건한 낙관성과 믿음을 나 또한 가질 수 있을까. 이토록 어리석고 유약한 내가?


“미래를 바라보는 그러한 낙관성은 어머니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모두 괜찮다’라고 말함으로써 긍정성을 강화하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모두 괜찮을 거야’라고 말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낙천성을 유지하려면 현실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하거나 합리화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낙관성은 막연한 믿음만으로도 가능했다. 어머니는 신앙이 없었지만 대신 미래를 믿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언제나 현재의 좋은 것을 손에 잡기보다 미래에 도래할 좋은 것을 기다리는 일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가는 대신,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유럽에 가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미래의 조각> p24


정영수 작가의 해석을 빌리자면, 나의 어머니는 낙천적이면서도 낙관적이다. ‘괜찮다’며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괜찮을 것’이라고 미래를 믿는다. ‘미래를 바라보는 낙관성’은 그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경험 태반이 어머니가 긍정적으로 재해석한 이야기들일지라도, 결과적으로 어머니를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았고, 불신 없이 현재를 살게 했으며, 언제나 미래로 이끌었다. 그건 흡사 신념에 가까운 믿음, 신앙에 가까운 신념. 낙관하는 미래의 실체를 분명하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혹여 그렸던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해도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미래에 남겨둔 채로 일단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도 어머니의 낙관성은 현실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빛을 발한다. 그렇기에 <미래의 조각> 속 어머니의 낙관과는 다르다.


“어머니의 글은 조금씩 변주되며 여러 권의 공책을 거쳐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그 글의 형식이었다. 어머니 특유의 낭만성과 비장미가 느껴지는 문체는 여전했는데, 그 글들에는 시제가 섞여서 사용되고 있었다.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 미래 시제가 혼재되어 있었다. 할 것이다, 했다, 한다, 될 것이다, 되었다, 된다... 어머니의 글은 마치 다중 우주를 그리는 미래의 일기 같았는데, 그것은 가능성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내가 쓰는/쓰려는 글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글은 어머니의 실패한 유크로니아였다. 낙관의 실패가 아니라, 구성의 실패. 어머니는 가능한 삶을 계속해서 써나갔지만 자유롭게 펼쳐진 자신만의 노트에서도 과거 속의 미래를 온전하게 재구성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었다.” p35


화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통째로 돌려받고 싶어”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기에 픽션들로 과거를 재구성하였고, 그조차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현재의 삶을 포기하려 했다. 허나 분명한 건 그녀에게도 미래에의 낙관은 있었다는 것이다. 살아 있고 살고자 하는 한, 그녀는 낙관주의자이다. 소설 말미에서 아들인 화자가 이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할 때, 그런 낙관성은 어쩌면 생을 이어가려는 이들의 본성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 또한 낙관주의자로 살아가리라고, 믿어보고 싶어졌다.


믿음 밖에는 대안이 없다. 


내가 그리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아직도 나를 주눅들게 하지만, 여전히 미래는 낙관할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미래는 언제까지고 미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실패한 과거 속에도. 그러니 그 말이 미래 시제로 존재하는 한, 나는 그 말을 믿는다. (...)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채로 멀리 있다. p37"



형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나는 사실 어머니의 말을 믿었다. 어머니가 괜찮을 거라는 말. 어머니에게만큼 나에게도 나만의 믿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머니가 그리는 괜찮은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과거가 괜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미래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낙관이 가능한 이유는 미래는 언제까지고 미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실패한 과거 속에도. 그러니 그 말이 미래 시제로 존재하는 한,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믿기로 한다.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공유하는 유일한 자원인 것처럼.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염려와 달리,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채로 멀리 있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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