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가 웃고 있다. 비명 같은 소리다. 예전에는 천장을 꼭 쳐다보곤 했다. 반사적으로, 그러다 습관적으로. 이제는 무신경하게 하던 일을 한다. 오늘의 웃음은 어딘지 괴상하여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았다. 역시 웃고 있다. 웃음은 환호성으로 이어지다 분통으로 뒤바뀐다. 저런.
몇년 전 어느 늦은 밤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온 지 며칠되지 않은 때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천장을 올려다봤다. J 방으로 건너가서 너도 혹시 들었느냐 묻다 재차 들려온 소리에 우리 둘은 멈칫했고, 이윽고 영문 모른 채 내 손에 이끌려온 남편과 함께 온가족이 한동안 천장을 주시했다. 소음은 내 방에서 크게 들렸다. 소리는 뭉개져 의미를 알 수 없었으나 욕설임은 분명했다. 화통을 삶아 먹었나. 싸운다기엔 맞받아치는 소리가 없는데. 남편은 어깨를 으쓱이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저러다 말겠거니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분노조절이 안되는 건가, 그런 이를 머리 위에 얹고 살게 되나. 심란해져선 천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J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게임하나 본데? 그러곤 방을 나섰다. 아... 아!
시와 도의 경계를 넘어 여러 집을 거쳐왔다. 그간 층간소음에 시달려 본 적은 없다. 우리 가족이 만드는 소음에 전전긍긍했을 뿐이다. 가령 J가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거나 아이들이 여럿 놀러와 있는데 인터폰이 울리기라도 하면 심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다행히 나의 이웃들은 소리를 소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 남편이 오디오라는 취미에 눈뜬 뒤로는 스피커가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남편은 소리에 민감해졌고 나는 신경이 예민해졌다. 어느 밤에는 남편이 신이 나선 톨보이 스피커를 네 개나 들고왔다. 당근으로 헐값에 얻어왔다면서 그는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지만, 나는 얼굴이 도무지 펴지질 않았다. 홈시어터를 만들겠다며 거실에 빔프로가 설치되자 볼륨 좀 줄이자는 내 잔소리도 신경질적으로 늘었다. 그런 나날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오디오 열정은 한풀 꺾였다. 아마도 J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거실에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인 것 같다. 이웃도, 와이프도 아니라 입시생 눈치를 보느라 강제휴덕에 처해지곤 (어쩌면 완전한) 탈덕에 이른 모양이다.
이사오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안면을 튼 이웃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윗집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아들이 둘 있는 점잖은 분들이 산다 했다. "그렇군요." "첫째는 직장 다니고 둘째는 대학생일 걸요." 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계절이 봄으로 바뀌자 소음의 빈도수가 확 줄었다. 늦은 밤 예의 소리가 들려오면 아들이 본가에 왔구나, 데시벨이 두배쯤 커지는 주말이면 아들들이 함께 노나보다 했다. 게임을 한다 생각한 뒤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서울의 원룸 실태를 겪어 보니, 그래 차라리 여기서 맘껏 소리 질러라 싶기도 했다.
지난달 J가 첫 방학을 맞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J의 첫 자취공간은 작고 벽이 얇아 소음에 취약하다. "옆방 남자애가 밤마다 밤양갱을 불러대. 친구랑 통화하는 소리도 들려." 언젠가 원룸을 찾아간 우리에게 J는 자기 이름을 크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도 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다면서. 닭장 같은 원룸에서 기척을 죽이며 지내던 J는 이제 너른 거실탁자에 둥지를 틀고서 온종일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컴퓨터 작업을 한다. 나는 선곡만 바꿔달라 요청할 뿐이다. 에스파와 뉴진스와 키오프의 노래 가사들을 외울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윗집 아들도 돌아왔다.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요즘 이 친구의 승률은 저조한 것 같다...
층간소음을 소재로 한 단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었고 베스트라 생각해온 소설은 황정은 작가의 <누가>이다. 단편집 ≪아무도 아닌≫ 수록작으로, 소설의 마지막 한 줄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결말부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충격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이후 처음이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해를 끼친 것도 없는" 주인공은 윗집 층간소음의 피해자이지만, 종내는 아랫집에게서 "씨발 년"이라 호명된다. 층간소음이 계급 문제로 치환되는 세계, 서로가 서로의 지옥이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풀이되는 '씨발스러움'의 세계를 이 단편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내 마음까지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릿터 48호 수록작인 김기태 작가의 <일렉트릭 픽션>은 <누가>와 아주 다른 세계를 꿈꾸고 제시한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 존재의 필연적 취약성을 드러내며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다. "문 안의 삶"을 위해 "문밖의 일"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장 소망하게 될까. "문밖의 삶을 위하여 문 안에서는 몸뚱이를 씻기고 눕히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있는 곳, 가장 아끼는 공간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고 끼고 사는 칸칸의 공간에서 어떤 소망은 실현하기 어렵다. 그게 일렉트릭 기타 연주라면 두말할 나위 없겠지.
소설에는 두 번의 호소와 두 번의 응답이 나온다.
“기타 연주하는 분께. 이웃끼리 배려 부탁합니다. 집에 아기가 있어요.”
“저는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 가끔만 집에서 연주합니다. 9시 이후에는 안하겠습니다. 불편함이 있으시면 505호에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만 따진다면 양립하기 어려운 호소들이다. (이웃의) 첫번째 호소에 주인공은 기타를 바로 포기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그는 타인의 요구에 순응하고 자신을 감추고 뒤로 물러서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그는 (어쩌면 난생 처음) 타인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 순응하고자 한다. A4용지에 정갈한 글씨체로 그는 호소한다.
"저는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
(주인공의) 두번째 호소가 잠고문으로 일상이 피폐해진 누군가에게는 이기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옛날옛적 잠귀 예민한 J를 재우느라 눈에 실핏줄 가시지 않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호소에 기꺼이 동조하고 싶었다. 촘촘히 서술된 그의 전사(前史)로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그의 삶에 "로킹하고 재지하고 블루지한" 음악이 함께하길, 나 또한 바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 '나'의) 두번째 응답에 마음이 일렁였다.
이야기의 화자 '나'는 어느 늦은 밤 "다 쓴 건전지의 기분으로" 귀가하다가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메모를 발견한다. 그러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을 다하는" 공간에서 지난 8년간 소리로 "잠깐 존재를 알렸던 사람들"을 되돌아본다. 울고 싶을 때 우렁차게 울고 뛰고 싶을 때 쿵쾅쿵쾅 뛰는 아기를 상상하며, 그리고 어느 저녁 희미한 전기기타 소리로 존재를 알렸던 505호를 생각하며, '나'는 종이의 여백에 써넣는다.
“저도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
이 마음이 정말이지 좋았다.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며, 일상적 존재 방식으로 인한 소음은 피할 수 없다. 모니터 너머 사람 있고, 벽 너머 사람이 산다. 익명의 세계에서 너머에 있는 타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윤리적 요구처럼 느껴진다. 이야기를 상상한다고 상호신뢰를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의 평안은 찾을 수 있다. 마당과 지붕, 그리고 골목을 이웃과 나누던 옛날을 생각해보면, 불편과 불평이 이어지다가도 한조각 연민 또한 뒤따르지 않았던가. 서로의 처지를 알기에 가능했던 마음 같다. 이 마음은 나를 음습하고 어둑한 그늘에서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놓는다.
이 소설은 액자식 구성이 주제와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액자 속 '그'의 이야기가 실제인지 화자 '나'의 상상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3인칭 타인의 삶이 1인칭 나의 삶으로 전환되는 결말부가 그토록 강렬했던 이유는, '내'가 '그'의 삶을 상상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 '그'가 자신의 존재와 마음을 드러낸 순간 '나' 또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으로 타인이존재하는 방식을 수용할 수 있으며, 이것이 타인을환대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좋은 소설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