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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외로움을 숨기고 싶을 때

올릴비아 랭,《외로운 도시》

by islander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면서도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올리비아 랭



2024. 12. 25. 물의 날.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한낮의 우울》을 읽고 있다...니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이게 말이 되냐 싶은 일이 요즘 어디 한둘인가. 아주 오래전 이 책에 그었던 마지막 밑줄에 다시 도달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를 실천하지. 첫째,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정체를 파악하는거야. 그 다음엔 그것이 영구적인 상황임을 받아들이는 거지.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여 현실 세계로 뛰어드는 거지." pp235-236


앤드류 솔로몬은 다양한 우울증 치료법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중 클로디아 위버의 사례가 인상적이다. 위버는 증세가 심해지면 약물치료를 받아야했지만, 동종요법을 비롯하여 명상과 식이요법 등의 대체요법, 영성치료, 심지어 줄리아 캐머런의 그 유명한 '모닝페이지 쓰기'까지 온갖 방법들을 간구했다. 위버의 이야기에서 기억해야할 점은 이런 시도들이 얼마나 효과 있었는지가 아니다. 우울증이라는 '영구적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성장과 배움에 인생의 초점을 맞춰 성찰하고 탐색하기. 솔로몬이 짚어주듯이 위버의 이러한 탐구적 정신이 극심한 우울증을 겪으면서도 그녀가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것. 그녀는 말했다. "난 그걸 이해해. 그러니까 운이 좋은 셈이야."


외면하고만 싶은 어둑한 감정을 직시하고 톺아보는 것. 고통스러운 이해에서 멈추지 않고 감정과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올리비아 랭이《외로운 도시》에서 보여주는 자세이기도 하다.




KakaoTalk_20250326_165750656 (2).png #The Lonely City #올리비아랭 #예술에세이 #어크로스


#외로움 #뉴욕 #예술가... 책에 상투적인 인상을 덧입히는 소재들을 갖고서 랭은 짐작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작은 근사하지만 익숙하다. 거대한 도시의 외로운 밤에 느껴질 법한 감정의 향취, 하지만 낭만화할 수 없는 고통의 증거이자 증세로서의 감정으로 시작한다.


올리비아 랭은 장거리 연애 끝에 영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미국행을 감행한다. 하지만 연인의 변심으로 연고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강한 영국식 억양 탓에 일상적인 교류마저 번번이 실패하자 위축된 나머지 공황 발작이 찾아오기도 한다. 드러난 사연은 이게 거의 전부다. 매 챕터마다 자신이 놓인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 장면들은 주제별 예술가들의 삶으로 들어가는 출구랄까, 본격적인 이야기의 단초로서 제공될 뿐이다.


가령, 외로움을 은폐한 채로 군중이 전하는 활기 속에 머물고자 했으나 '혼자'라는 자각으로 되레 피곤해졌던 핼러윈 퍼레이드, 올드 뉴욕의 덤벨 공동주택 같은 낡은 집, 이전 주인의 물건들로 가득한 공간, 타인의 기척은 밤낮을 가리지 않지만 친밀성은 부재한 '사각지대'. 외로움을 수치스러워하며 클라우스 노미의 뮤직비디오를 보던 소파, 창밖으로 대형전광판의 푸른색 빛이 점멸하는 임시 셋집. 그곳에서 자신이 느꼈던 외로움의 다양한 문제적 얼굴을 특히 뉴욕을 근거지로 활동한 예술가들과 맞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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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Rimbaud in New York series by David Wojnarowicz @ The David Wojnarowicz Foundation



#에드워드호퍼 #앤디워홀 #클라우스노미 #헨리다거 #데이비드워나로위츠 #조레너드... 랭은 이들을 '외로운 도시의 기록자들'이라 부른다. 이 도시는 뉴욕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로움 그 자체다. '외로움이라는 이 특별한 장소'에서 예술가들은 분리되고 배제된 자신의 조각들을 잇고 수선하여 예술로 통합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다.


랭이 재해석한 예술가들의 면면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외로움'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정서적 경험'으로서의 감정과 예술가들의 '외로운 삶'을 조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사회적 연대, 서로를 향한 친절과 책임감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첫인상만으로는 '외로운 도시'와 가장 어울리는 예술가는 호퍼이고 가장 동떨어져 보이는 건 워홀 같다. 하지만 '연결과 접촉에의 열망과 두려움'이라는 측면에서 워홀(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작품을 태동시킨 그의 정체성과 삶)은 우리 세대의 초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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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e Leonard, Strange Fruit (for David) (detail), 1992-97(Credit: hauserwirth.com)
strange fruit.JPG 거부/고립/배제/침묵당한 존재, 버려진 것들, 그리고 친구 워나로위츠를 위한 헌정 작품


이 책의 전반에 가장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는 워나로위츠라고 나는 생각했다. 랭은 그의 삶과 예술을 통해 외로움이라는 개별적이고 사적인 감정이 정치사회적 의제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도시에서 진행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있고, 감정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균질화하고 표백하고 영향력을 죽여버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다." p369


감정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다는 지적은 깊이 새겨볼만 하다. 어떤 감정들은 전시하고 과시하는 반면에 어떤 감정들은 은폐하려들지 않나. 내 마음을 휘두르지 않도록 멀리 치워버리고,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깊이 묻어두는 것이다. 단절감, 소외감, 외로움. 자칫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번지기 쉬운 슬픈 감정들. 자신을 진창으로 밀어넣는 어둑한 감정들에서 뒷걸음치고 싶을 때, 랭이 던진 질문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고독의 고통은 은폐와 관련된다. 약점을 숨기도록, 추함을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도록, 흉터를 문자 그대로 역겨운 것인 양 덮어버리도록 강요하는 감정에 관련된다. 그런데 왜 숨기는가? 결핍이, 욕망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 불행을 경험하는 것이 뭐가 그리 수치스러운가? 왜 끊임없이 절정에 머물러야 하는가? 세계 전반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여 둘만의 단위 속에 안락하게 봉인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p368


워나로위츠는 버려진 부둣가에 풀씨를 흩뿌리곤 했다고 한다. "뭔가 아름다운 것이 폐허 부스러기를 뚫고 피어나지 않을까" 바라면서 말이다. 그가 만든 풀밭에서 빈둥거리는 사진을 랭은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책을 덮은 뒤에도 내가 보지도 않은 이 사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곳에는 "풀과 잔해들이 섞여 흩어져 있고, 부스러지는 석고와 흙덩이 사이로 풀이" 쌉싸름한 여름냄새를 풍기며 바람 속에 흩날린다. 한평생 배척받았으나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자신이 만든 천국 속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마음의 흉진 자리에도 아름다움이 싹틀 것이다. 그런 힘을 가진 씨앗들이 우리에게도 있다. 때로 그것은 예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앞서 아름다움을 싹틔운 자들이 빚어낸 예술이다. 그리고 서로를 향한 다정함, 친절, 선의라는 이름의 씨앗이기도 하다. 어떤 씨앗은,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불쾌하니 은폐하라는 요구에 저항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런 씨앗들이 있기에 빈번이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모습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께 살아간다.(p370)"




덧.


어쩌다 보니 환영받지 못하는 감정들에 관한 책을 내리 읽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격인 외로움이 어떻게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는지 이 책을 통해 배웠다. 의도치 않게 '감정의 정치성'이라는 독서의 맥이 이어진 듯하여 좋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책의 전반에 걸쳐 loneliness가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으로 옮겨져 있다. 내면성장·자아성찰이라는 측면에서 고독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되었을까. 그러나 랭이 다루는 감정은 자발적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다. 사회적 불평등의 산물이기도 하며, 보다 파괴적이고 고립되고 배제된 상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로움과 고독은 '하나', '홀로'라는 비슷한 원형을 지녔으나 우리는 이 두 단어에 각기 다른 이미지를 덧칠해오지 않았나. 고요 속 침잠과 성찰, 철학적 색채를 부여받은 건 '고독'이며, 우리가 떳떳이 드러내어 알리는 것도, 기껍게 즐기는 대상도 '고독'일 것이다. 은폐의 고통에서 배양되어 고통의 연대로 꽃피울 수 있는 씨앗은 '외로움'에게 주고싶다.


“워나로위츠는 생전에 운동화를 신은 조니 애플시드처럼 커낼로의 상점에서 풀씨를 사서 부두를 돌아다니며 한 줌씩 흩뿌리곤 했다. 뭔가 아름다운 것이 폐허 부스러기를 뚫고 피어나지 않을까 해서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사진은 그가 출항장이나 버려진 짐 더미 중 한 군데에 뿌린 씨앗에서 돋아난 풀밭 위로 빈둥거리는 모습이 담긴 것이다. 풀과 잔해들이 섞여 흩어져 있고, 부스러지는 석고와 흙덩이 사이로 풀이 자란 모습이 보인다. 이는 익명의 예술, 서명할 수 없는 예술, 변형에 관한 예술, 그저 쓰레기에 불과했을 것을 연금술처럼 바꿔놓은 예술이었다.” p285
“예술은 아주 비상한 기능을 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중재하는 기묘한 능력이다. 그것은 친밀성을 창조하는 능력이 분명 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면서도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p369
"고독이 반드시 누구를 만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 또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스티그마와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임을, 그래서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하는 대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다. 고독은 집단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시다. 그 속에 거주하는 법을 말하자면, 규칙도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지는 의무를 짓밟지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뿐이다. 우리는 상처가 켜켜이 쌓인 이곳, 너무나 자주 지옥의 모습을 보이는 물리적이고 일시적인 천국을 함께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존재했던 것들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을 위한 시간이 영영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p370


the-new-york-public-library-IordXREq3vM-unsplash.jpg 이미지 출처: the-new-york-public-librar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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