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결혼은 몰라도 나중에 아이는 안 낳을 거야.
출산이라니, 너무 무서워.
언제부턴지 기억도 안 나던 시절부터 엄마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콧구멍에서 수박이 나오는 기분", "손가락 절단과 비슷한 수준의 아픔"이라는 등 출산에 대한 묘사를 들을 때마다 결코 겪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혹시라도 훗날 아이가 갖고 싶으면 어떡할 거냐는 물음에 '그럼 차라리 입양을 할 거'라고 당차게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러던 내가 낯선 땅 네덜란드에서 아이를 낳을 줄이야.
누군가 네덜란드에서의 지난 열 달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전반적으로는 다 좋았어!"라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일단 임신과 출산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나에겐 도움이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겪어보지 않은 이 과정에 대해 상당히 공포감을 갖고 있었는데, 여러 관련 기관들에서 느긋하고 여유롭게 대해 준 덕분에 나도 조금은 긴장을 풀고 이 과정에 임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태아 초음파 검진도 총 4~5회였는데, 한국에 비하면 상당히 '띄엄띄엄' 본 편이다.
사실 단순히 간격만 말하는 게 아니라 세밀함도 포함이다. 마지막 초음파 검진에서도 참 대충 봤으니 말이다. 아기의 예상 몸무게를 측정하기 위해 다리 길이, 머리 둘레, 복부 둘레를 재야 하는데 당시 담당 조산사 왈, '아기 자세가 안 좋아서 지금 못 재겠네. 일단 보이는 걸로는 건강해!'.
당시에는 '어, 일을 이렇게 해도 된다고?'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기는 하다. 너무 이상하지만 않으면 다 괜찮다고 판단하니 오히려 내게는 '그래, 건강하다니까 뭐.'라고 조금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또 외국인에게 친화적인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여러 곳에서 영어로 된 공식 자료가 있고 조산사, 산후도우미 등 모두가 영어로 원활히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내게 퍽 안심이 되었다. 물론 이 점은 외국인 거주 비중이 높은 암스테르담 지역이라 그랬을 것이긴 하다. 암스테르담 바로 옆 도시인 암스텔빈(Amstelveen)의 인구 중 약 10%가 외국인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할 정도니 말이다. (How many expats live in Amsterdam)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산후도우미 시스템도 괜찮았다. (뭐, 여느 유럽의 서비스가 그렇듯 자잘한 엉성함은 있었지만.) 한국에서도 정부에서 보조해주는 산후도우미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좋은' 관리사님을 를 확보하기 위해 검색하고 연락하고 확정하는 일련의 과정이 사람을 지치게 만들 것 같았다. 여기서도 물론 좋은 산후조리원을 확인을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거진 비슷비슷하려니. 내가 선택한 곳도 전반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한국인 '예비맘'들에게는 굳이 한국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 다만 기저질환이 있다거나 임신성 질환을 진단받았다면 한국에 가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특히 병원으로 전원(轉院)을 권유받은 상황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네덜란드의 '괜찮다'의 기준이 워낙 넓기 때문에 그 정도 소견이라면 불안할 수도 있다. 특히 초산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러니 괜히 초조해하지 말고 고향에서 낳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네덜란드의 시스템은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쭉 읽어봤다면 눈치챘겠지만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조산원에서 산모를 담당하고, 특이사항이 있을 경우 병원이 산모를 담당하는 방식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조산원과 병원 두 기관은 미묘하게 신경전을 펼치고 있어 보인다.
지난 1월, 조산원에서 한 설문조사에 참가해 달라는 매일을 받았다. 암스테르담에 건설할 출산센터(Birth centre)에 대한 사전 인식조사였다. 현재 시스템에서는 가정 출산을 원치 않는 건강한 산모는 무조건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병원의 인력이 늘 부족하여 이들 산모를 위한 자리가 별로 없다. 따라서 조산원에서 병원과 비슷한 시설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병원과 조산원 간 미묘한 신경전은 이뿐만이 아니다. 4월에는 조산원에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하루 파업을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헤이그에서 열리는 ‘통합 기금제(Integraal tarife)’ 반대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2017년 네덜란드 정부에서는 임신, 출산 관련 보험 비용 청구 방식을 변경하겠다고 했다. 조산원, 병원 등 관련 기관이 보험사에 각각 비용 청구를 하는 대신 정해진 한 기금에서 이들 기관이 일부씩 가져가도록 말이다. 이것이 '통합 기금제'였다.
네덜란드 정부는 영유아 사망률을 더욱 개선하고 각 기관이 수익성을 위해 산모를 오래 붙들어 두고 있는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서 이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조산사 협회에서는 당연히 이 제도의 도입을 반대하고 있다. 가정 출산이 제한을 받게 될 여지도 있고, 병원에 유리하게 기금이 배분될 것이라는 우려 등의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시행을 한 지역의 조산사는 두 기관의 협진보다 행정적인 부담만 늘어났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런 내게 누군가 '병원 vs. 조산원?'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병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나는 조산원에서 받은 여러 진료와 프로그램에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지만 지금보다 훨씬 병원 문턱이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기록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임신 기간 중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병원에 못 가고 집에서 낳게 되면 어떡하지?'였다. 이 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나의 선택권이 제한받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한 말로 당장 출산이 눈앞인데 산모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 조산사의 모습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 짧은 시간 동안 집중해서 출산을 도와준 병원 의료진의 모습이 지난 열 달간 함께 한 조산사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전통'이라는 미명하게 가정 출산과 조산원을 포함한 3단계 의료 체계를 억지로 유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딱 봐도 병원이 커버할 수 있는 산모 범위가 훨씬 크지 않은가? 그러니 병원이라는 일원화된 기관에서 맞춤형 의료 서비스를 할 수 있다면 나와 같은 '건강한, 하지만 집에서 출산은 하기 싫은' 산모의 요구도 충족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충분한 병원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조산사를 의료 인력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패스트 트랙을 만드는 등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민해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지금 안방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가의 모습을 보면 그저 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만 든다. 세 명이 된 새로운 가족의 모습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또 어떨까? 설레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쳐본다.
[참고 자료]
https://nos.nl/artikel/2112957-protest-verloskundigen-vindt-geen-gehoor-in-tweede-kamer
https://nos.nl/artikel/2424928-verloskundigen-tegen-plan-kuipers-we-verliezen-onze-autonomie
https://nos.nl/artikel/2112519-het-gaat-steeds-beter-in-de-geboortezorg
https://nos.nl/artikel/2213717-babysterfte-in-nederland-blijft-da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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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os.nl/nieuwsuur/artikel/2399640-druk-op-geboortezorg-met-moeite-bemannen-we-de-bedden
https://amsterdamyeah.com/how-many-expats-live-in-amsterdam/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258353/infant-mortality-rate-in-europe/
https://www.macrotrends.net/countries/NLD/netherlands/infant-mortality-r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