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음식 동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빛시 Dec 14. 2018

운명

음식 동화 6 :: 브로콜리 쇠고기 미음

가지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어요.


"여러분, 내일은 가족에 대해 공부할 거예요. 집에 가서 자신과 부모님의 닮은 점을 한 가지만 찾아 오도록 하세요."


"그게 숙제예요?"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앗싸, 오늘은 놀아야지!"


어려운 숙제를 내기로 소문난 선생님이 웬일이었을까요? 야채 친구들은 모두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꼬마 브로콜리도 마찬가지였고요. 초록색 얼굴과 몽글몽글한 머리, 단단한 몸뚱이 같은 게 아빠를 꼭 닮았기에, 그에게도 숙제가 무척 쉽게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게 확실한 지 확인하기 위해 엄마에게 여쭤보았어요.


"엄마, 저는 아빠 닮은 거 맞죠?"


그러자 엄마의 얼굴이 어두운 진녹빛으로 바뀌었어요.


"음. 어떤 의미로 물어보는 거니?"


그러자 꼬마 브로콜리는 '아차!' 싶었어요. 엄마는 늘 '아빠를 닮으면 절대 안 된다'라고 당부하곤 하셨거든요. 꼬마 브로콜리는 말꼬리를 감췄어요.


"아... 아니예요. 참! 나는 엄마도 닮았다. 그쵸?"


틈만 나면 꼬마와 신나게 놀아주는 브로콜리 아빠. 세상에서 내 새끼가 최고라고 말하는 남편을 아내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요. 꼬마 브로콜리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어요. 아빠는 매일 밤 술에 절어서 돌아오시거든요. 초고추장 아저씨와 함께 일하시는 아빠의 직업은 술안주. 정확히 말하면 브로콜리 초회예요. 고주망태가 된 아빠를 보며 엄마는 "하고 많은 안주 중에서 왜 하필..."이라고 탄식했어요. 브로콜리 초회는 다른 친구 없이 손님들을 대해야 하기 때문에 더 빠르고 진하게 술에 취하게 되거든요. 아빠도 이 일이 싫어서 몇 번이나 전직을 시도해 보았대요. 하지만 브로콜리는 일단 한 가지 직업이 정해지면 계속 그 일만 해야 하는 프렉탈 구조. 그래서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지요. 엄마는 그걸 '운명'이라고 불렀어요.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꼬마 브로콜리는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그 단어를 알려주신 엄마는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거야'라고만 하셨지요. 하지만 꼬마 브로콜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결국 꼬마는 엄마 몰래 하양하양 콜리플라워 아저씨네로 향하고 말했어요. 아저씨는 꼬마 브로콜리의 고민을 들어주는 걸 좋아하셨거든요. 하지만 브로콜리 엄마는 그걸 탐탁지 않게 여겼어요. 브로콜리를 닮긴 했지만 온몸이 흰 색이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나요?


"아저씨 운명이 뭔가요?"


아저씨는 평소처럼 하얀 궁금증을 터뜨리며 되물었어요.


"오호, 얘야 그게 왜 궁금하니?"


꼬마 브로콜리의 이야기를 들은 하양하양 아저씨는 무겁게 입을 열었어요.


"네?"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서 꼬마 브로콜리는 몽글몽글한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어요. 그의 말인 즉, 브로콜리와 콜리플라워는 본디 조상이 같았대요. 그런데 그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었던 이들이 운명을 개척한 덕분에 각기 브로콜리와 콜리플라워로 탈바꿈하게 된 것. 삶을 개척한 다른 이들로는 콜라비, 케일, 양배추 등이 있다고도 했어요.


"그런데 왜 우리 엄마 아빠는 그런 말씀을 안 해주신 거죠?"


"운명을 바꾸는 게 쉽지 않거든."


"아..."


동그랗게 눈을 뜬 꼬마 브로콜리에게 하양하양 아저씨는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열어 보였어요. 실험실이었지요. 그 안에는 처음 보는 기구들과 씨앗, 뿌리, 잎사귀들이 가득했어요.


"나도 쉽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란다. 기억하렴,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 꼬마 브로콜리의 귓가에 윙윙거렸어요. 꼬마는 그걸 꼭 아빠에게 전하리라 다짐했어요. 그러고는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지요. 그날도 알코올에 푹 절여져 말캉해진 아빠가 현관문을 열었어요. 엄마 곁에서 잠을 자는 척하고 있던 꼬마 브로콜리는 문 쪽으로 달려갔어요. 술 냄새가 자욱한 품 속에서 꼬마 브로콜리가 입을 열었지요.


"있잖아요 아빠. 아빠도 바뀔 수 있대요."


"그게 무슨 말이니?"


"엄마는 아빠가 술안주 일을 하는 게 싫대요. 그래서..."


"너는 들어가 있어."


엄마였어요. 잠옷을 입은 아내를 향해 브로콜리 아빠가 소리쳤어요.


"이봐! 이건 내 운명이라고!"


"당신이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게 결코 아니에요! 하지만 술을 섭취하게 되는 양을 좀 줄이면 좋겠어요. 당신 건강도 걱정되고, 우리 애까지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요. 아이들은 보는 대로 자란다는 거 몰라요? 게다가 아이가 당신을 그토록 좋아하는 걸 보면 그렇게 될 확률도 적지 않다고요!"


평소 말수가 거의 없는 엄마 브로콜리의 긴 외침였어요. 기관총 같은 말의 총알을 맞은 집 안에서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지요. 침묵을 깬 건 웅웅거리는 냉장고. 그 소리를 들은 엄마는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냉장고 문을 열고 봉지 한 개를 꺼냈어요.


"소고기예요."


야채들에게 고기는 무척 귀한 것이었어요. 너무나도 비쌌거든요. 브로콜리 엄마는 생활비를 줄여가며 조금씩 고기 살 돈을 마련해 왔다면서, 앞으로는 술꾼들을 홑몸으로 대하지 말고 소고기와 함께 술상 위에 오르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지금보다는 조금 덜 취하게 될 거라면서요. 그때였어요.


"아우야."


미처 닫히지 못한 문 밖에 하양하양 아저씨가 서 있었어요.


"혀... 형님이 어쩐 일로."


"이왕 운명을 바꾸려거든 목표를 크게 해야지. 아들에게 네 이야기 다 들었다. 내 생각에는 계속 안주로 머무르는 것보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보는 게 더 좋겠다마는."


하양하양 아저씨의 손에는 묵직한 비닐 봉지가 들려 있었어요. 뽀오얗고 보드라운 쌀가루였지요.


"술꾼들의 유혹을 확실하게 뿌리칠 수 있을 게다."


밤새 꼬마 브로콜리네 집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피어 올랐어요. 가족 모두 힘을 합쳐서 아빠의 운명을 바꾸는 중이었거든요. 엄마가 구해온 소고기, 사촌 형님이 준 쌀가루, 브로콜리 아빠의 몸 한 귀퉁이, 그리고 아빠를 향한 꼬마 브로콜리의 응원이 따듯한 미음으로 바뀌고 있었지요. 브로콜리 소고기 미음 말이에요. 이건 어린 아기들을 위한 음식이니 술꾼들은 정말로 접근하지 못하겠지요? 게다가 꼬마 브로콜리는 이제 학교에 가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아빠를 닮았어요!"라고 말이죠.








매거진의 이전글 광계 여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