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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시 Jan 18. 2019

바나나에 반한 1

음식 동화 11 :: 바나나

옛날 어느 나라에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사내가 있었어요. 병에 걸린 어머니는 밥 숟가락조차 혼자 들 수 없었고, 사내는 자신의 목숨이 닿는 데까지 어머니를 봉양하리라 다짐했어요. 손재주가 무척 뛰어났지만 어머니의 끼니를 챙겨 드리기 위해서는 일을 멀리 나갈 수 없었던 그. 결국 집 근처에 있는 대장간 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답니다. 사내의 머릿속에는 늘 "어머니께 어떤 음식을 대접해 드리면 좋을까?"라는 물음이 놓여 있었어요. 그것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그의 마음 속에 둥둥 떠다녔고요. 하지만 사내의 얇은 주머니로는 택도 없는 것들이었지요.  


매미 소리가 귓가를 사정없이 두드리는 여름. 사내의 이마에서 솟아난 땀들은 여기저기로 미끄럼틀을 타 내려가고 있었어요. 그가 새로운 거푸집 한 개를 만들고 있었거든요. 완성된 거푸집 안으로 시뻘건 쇳물이 흘러들어갔고 무언가가 꺼내졌어요. 한 입에 쏙 들어갈 만한 두께와 대여섯 번 정도 베어먹을 수 있는 길이의 쇠 막대기였지요. 사내는 혼잣말을 했어요. "이게 설탕처럼 달고 구름처럼 부드러운 것이라면 좋을 텐데." 맴맴 대장간을 울리는 매미 소리와 함께 그는 깜박 잠이 들었어요.


"또 요상한 걸 만들어냈군?"


두꺼운 목소리가 사내를 툭툭 깨웠어요. 화들짝 놀란 그는 대장장이를 쳐다 보았지요.


"아... 그.. 시간이 좀 나서 뭣 좀 만들어 봤습니다."


점심 시간이라는 말에 사내는 집으로 뛰어갔어요. 손에는 자네가 만든 거라며 대장장이가 건네준 것이 들려 있었고요.


"내가 알아서 먹으면 되는데... 또 밥 주러 왔니?"


쾡한 눈과 수척한 볼이 아들을 맞이했어요.


"일하는 것만도 힘들 텐데."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내려둔 채 어머니를 힘껏 안아드렸어요.


"뭘요, 시장하셨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식사를 준비하는 사내의 등 뒤로 쩝쩝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곧 밥상을 들고온 사내는 눈을 비볐어요. 어머니의 꺼져가던 눈에서 빛이 나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손에는 길고 노란 껍질 같은 것이 들려 있었지요.


"네가 여기 놓고 간 걸 먹었더니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구나!"


어머니와 식사를 마친 사내가 껍질을 들고 대장간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그가 만든 거푸집은 이미 대장간 주인의 손에 의해 깨져버린 후. 사내는 그래도 어머니께 잠시나마 힘을 드렸다는 것에 만족하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 날 아침이었어요.


"얘야 이건 뭐니?"


어머니의 목소리에 밖으로 나온 사내. 그의 눈에 어제까지는 없던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어요. 가지에는 어제 자신이 만든 쇠 막대기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 하나가 달려 있었고요. 어머니는 어제 자신이 먹었던 거라며 환하게 웃으셨어요. 이튿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열매는 하루에 한 개씩 열렸어요. 매일 아침 사내는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께 열매를 드렸답니다. 그 덕분에 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나아졌고요. 이제는 식사는 물론 거동도 자유로워진 어머니가 사내에게 말했어요.


"저 열매 덕분에 내가 많이 나았구나. 이젠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누도록 하면 어떻겠니?"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가장 먼저 대장장이를 떠올렸어요. 그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를 이렇게 모실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죠. 열매를 한 입 베어문 주인. 혀를 감싼 채 녹아버리는 기묘한 달콤함에 그는 순간 아뜩아뜩해졌어요. 여름 눈 녹 듯 열매를 먹어치운 그는 길에서 본 벽보를 기억해냈어요. '공주님의 신랑을 찾습니다'라고 써있던 글 말이에요.


그 나라에는 굉장히 예민한 공주가 살고 있었어요. 잠투정이 심한 것은 물론 입도 무척 짧아서 어지간한 음식이 아니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요. 그런데 최근 공주의 밥투정이 심해져서 물 말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었어요. 이에 왕은 공주의 입맛을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잘 하면 부마자리까지 내어주겠노라고 공언했지요.


열매의 맛에 확신을 가진 대장장이는 곧장 왕궁으로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없는 걸 진상할 수는 없는 노릇.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사내의 집 마당에 들어선 그는 조용히 나무에 올랐어요. 사내의 열매를 자루에 넣은 대장장이가 몇날 며칠을 걸었을까요? 왕궁에 다다른 그는 열두 명의 파수꾼과 열두 명의 신하를 거친 후에야 왕의 앞에 고개를 조아릴 수 있었어요. 그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수보다 더 많은 음식들을 가져왔지만 모두 공주의 마음에 들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때문에 왕궁의 분위기는 무척 냉랭해져 있었어요. 이제는 물밖에 마시지 않는 공주는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고요.


"무조건 잡수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마음이 급했던 대장장이는 자루를 열어보지도 않고 왕 앞에 바쳤어요. 자루 속에는 까맣게 쉬어버린 열매가 들어 있었고요. 왕의 표정은 태양보다 더 시뻘개졌고 대장장이의 얼굴은 열매보다 더 까매졌어요.


"감히 짐을 농락하는 것이냐? 이 따위 걸 어찌 우리 공주에게 먹인다는 게냐? 여봐라. 당장 이 사기꾼을 하옥하라."


"아...아닙니다. 사실 이걸 바치라고 했던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자가...."


말을 얼버무리는 이를 향해 왕은 더 큰 고함을 질렀어요.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국에 남의 핑계를 대다니! 저 놈을 지금 당장,"


"주...죽이셔도 좋습니다! 공주님 마음이 드시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대장장이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사내를 부르기로 약속했어요. 정확히는 사내의 열매를요. 소식을 들은 사내가 열매를 들고 왕궁 문을 열었어요.


"이것이옵니다."


사내가 내놓은 것은 가장 나이 많은 신하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어요. 다디단 향기는 멀리에서도 느껴질 정도였고요. 이윽고 공주가 등장했고 노란 껍질이 스르르 벗겨졌어요.


"공주야, 네가 맛이 없다고 하면 저 자는 곧,"


"우훗,"


대답 대신 흘러나온 건 공주의 웃음 소리. 왕은 물론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대신들도 눈이 둥그레졌어요. 공주는 달콤한 웃음을 흘리며 남은 것을 그 자리에서 먹어 버렸답니다.


"음... 다른 건 더 없나요?"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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