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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Nov 07. 2022

5성급 호텔이라니 우리 성공했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대사를 치르면서 주변 사람들이 한 번 정리되더니 '출산'과 '육아'라는 터널을 지나며 한 번 더 정리되었다. 사회인으로 만나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과는 평일이 아니면 만나지 않는 사이로 남았다. 어쩌다 마음에 맞는 비공직조직의 조직원끼리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기혼과 미혼이 뒤섞인 모임은 각자의 사정이 끊임없이 생겼고, 한 두 명씩 빠지는 줄타기가 계속되다가 와해되고는 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물리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적용되어 관계 유지를 위해 쏟던 감정과 에너지는 그대로 집과 가족에게로 옮겨갔다. 이제 내가 가진 에너지로는 하루 살기도 빠듯해서 하루 두 잔의 커피와 주말 낮잠으로 충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중년의 우리에게도 사회의 때가 묻기 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 교복이라는 특수 안전장치를 입고, 용돈 받아 떡볶이를 사 먹던 그 시절의 서로를 기억하는 친구 말이다. 그 친구들 앞에서는 사회적 역할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고, 주변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민낯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타내는 말 중에 '설명이 필요 없는 사이'라는 것은 최고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서른 중반쯤 열심히 소개팅을 하던 친구가 이제는 소개팅을 하는 것 자체가 진이 빠진다면서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설명하는 일이 이렇게 힘 빠지고 지치는 일인 줄 몰랐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오랜 친구들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뱉는 말은 낭비다. 척하면 척, 쿵하면 짝. 이제는 서로 다르다는 것마저도 인정해서 싸울 일도 없다. 그리고 지난 주말 나는 나의 오랜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그것도 '1박 2일'

로. 심지어 혼. 자. 서.




  남자들의 우정이 게임과 운동으로 싹튼다면, 여자들의 우정은 교환일기와 쪽지 그리고 화장실로 싹튼다.('화장실'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같이 갈 때 쌓이는 우정을 이야기한다) 더더군다나 여기에 진실게임 한 스푼과 못된 짓을 같이 한 일화들까지 첨가하면? 그럼 그 우정의 농밀함은 짙어지다 못해 각자의 인생에 진하게 물들어 버린다. 그 시절 우리가 했던 홀치기염색처럼.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함께한 특별한 친구들이 있다. '중2'라는 망토를 두르고 단체로 부모님과 선생님과 세상에 반항했다. 졸업하고 각자 다른 고등학교를 갔고, 다 다른 진로를 선택했지만 꾸준히 만나 온 우리는 생각보다 인원이 많다. 사람들은 중학교 동창 여섯 명이 모임을 한다고 하면 놀라는데 그 인원이 꾸준히 만난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라고, 정기적으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2022년. 2세들 중 막내가 네 살이 되었고, 이제는 모두 날개 옷을 되찾아 하늘을 날 준비를 마친 선녀들이 되었다. 이번 여행은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추진하게 된 여행이다. 인원이 많다 보니 날짜를 맞추기가 어려워 여행 3개월 전부터 일정을 조율했다. 대부분이 주양육자라 우리의 자리를 채울 대체 양육자는 물론 아이들 속옷과 양말 비상약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다. 3년 만의 여행인 만큼 여행지와 호텔을 정하는 데에도 신중했다. 이번 여행은 '제대로 쉬자'를 모토로 다들 가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던 서울의 5성급 호텔이 우리의 숙소로 결정되었다.



호텔에서 내려다 본 가을의 광화문


  광화문역 7번 출구. 여행 준비로 시끄러웠던 단톡방에서 그대로 몸만 빠져나왔다. 못 만났던 3년의 시간이 삭제된 것처럼 어색함이라고는 없다. 눈가와 입가에 잔주름이 지고 새치가 분분하게 자라 나오는 서로를 열다섯의 모습으로 기억해주는 친구들. 선명도는 떨어지지만 그 시절의 나는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변함없이 재생되고 있다.

 

  호텔에 들어서니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직원들의 미소와 친절 때문인지 말린 어깨도 펴지고 키도 커 진 기분이다. 체크인을 하고 방문을 여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여기가 들어보기만 했던 사계절 호텔이구나.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풀썩! 구름에 뛰어들면 이런 기분일까? 온몸을 그대로 감싸버리는 침구의 푹신함에 다 같이 외쳤다 "와!"


한 명이 물었다.


"여기 얼마라고?"

"88만 원"

"방 두 개에?"

"아니, 하나에"

"뭐? 야, 다들 일단 누워. 밥 먹으러 가기 전에 5만 원어치 누워있다 나가자."


  숙박비를 듣고 나서 본전 생각부터 나는 걸 보니 영락없는 아줌마다. 아무도 누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예약해 놓은 식당에 가는 것 말고 다른 계획은 없다. (철저한 P들의 모임이다. 그 와중에 저녁 예약한 B 매우 칭찬해) 희한하게 옛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그게 언제든 어느 곳이든 함께 했던 시공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 몇 분만에 광화문 한복판의 23층 호텔 객실은 1998년 OO중학교 2학년 10반 교실의 쉬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3 년 만에 만나는 우리가 선택한 호텔


  맨날 하는 그 이야기를 한 번 쭉 훑고 나니 금세 해가 졌다. 저녁은 9가지의 음식이 차례로 나오는 한식 코스 요리를 내주는 식당에서 먹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격 때문에 패스했겠지만 이제 우리는 88만 원짜리 방에서 자는 성공한 중년이니까 어디든 오케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찍고, 안 찍는 사람은 안 찍고, 술 마실 사람은 마시고, 안 마실 사람은 안 마신다. 이게 우리다. 수 십 번의 "야, 그거 기억나?" "야, 그때 기억나?"를 반복하며 사이좋게 팔짱 끼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광화문 밤거리를 걸었다.


유일하게 계획했던 저녁 식사




  홀로 떠나 온 아줌마들은 가고 싶도 가지 못했던 그곳! 호텔 BAR에 가보기로 했다. 전혀 입구 같지 않은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멋진 펍이 눈앞에 펼쳐졌다. 각자 취향에 맞는 칵테일을 주문하고 음악과 분위기에 한 껏 취했다. 여기서는 '진짜 좋다', '행복하다'는 말을 각자 두 번씩은 돌아가며 말했던 것 같다.

 

'비밀의 문'같은 바 입구와 내부



각자 마시고 싶은 칵테일을 골랐다




  서른 아홉의 우리에게는 24년 전에는 없었던 내 것이 많이 생겼다. 사회의 짠맛도 조직의 쓴 맛도 알고, 몸 담고 있는 곳에서 '모른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후배들이 꼰대라고 할세라 의식적으로 '라떼는'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찍어 먹지 않아도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식견마저 생겨버렸다. 각자의 위치에서 애들 이야기, 시댁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노후 이야기, 주식 이야기하다 보니 1박 2일이 금방 갔다.


  "지금 이 기억 그대로 가지고 우리가 만났던 중학교 2학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바꾸고 싶어?"


  이번 여행의 공식 질문이었다. 공부를 하겠다는 친구, 그냥 그대로 살겠다는 친구도 있다. 역시나 다 다르다. 밸런스 게임을 해도 일치하는 답 찾기까지 두 시간이 걸리는데 이런 질문에 비슷한 대답이 나올 리 없지. 그래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귀여운 단발머리 짹짹이들을 꼭 한 번 안아주고 싶다. 잘하고 있다고. 너네 참 예쁘다고. 나중까지 함께 하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열다섯의 우리도 좋았지만, 서른아홉의 우리도 참 좋다. 이만큼 잘 살아온 우리가 참 기특하다.


  얘들아, 우리 성공했다. 오십에도 환갑 때도 쭉 함께 하자. 알지? 이 모임은 종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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