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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Jan 24. 2023

수저통 바닥을 닦는 일

살림이란 그런 일

  일주일 전부터 깨끗한 집에 복이 들어오라는 마음으로 세밑에 살림을 정리했다. 신발장, 싱크대, 아이들 해묵은 옷과 서랍장까지 꽤 많은 짐을 비웠다. 유물처럼 모시고 있던 살림들을 비우고 나니 정리력 텐션이 한껏 올라왔다. 해가 바뀌는 이벤트 정도는 있어야지 찾아오는 이 텐션을 놓칠 수 없다. 그렇다고 매일이 설날이면 안될 일이니까. 


  어제는 식기건조대에 나와있는 그릇들을 정리했다. 낡고 깨졌지만 아까워서 둔 그릇과 아이들 이유식 할 때 썼던 그릇을 버렸다. 종류별로 정리해서 상부장에 넣고 나니 굳이 식기건조대가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2단이면 너무 답답하지 않나. 아니야 그래도 큰 냄비나 프라이팬 올리려면 있긴 있어야 해. 일단 두자.


  싱크대 상부장에 붙어있는 선반도 오랜만에 씻어냈다. 마지막에는 뜨거운 물을 부어 소독까지 마쳤다. 제법 깨끗해진 부엌에 도취되어 철수세미를 들었다. 싱크대 물때를 바득바득 힘주어 닦아냈다. 수세미로도 해결되지 않는 틈새는 칫솔을 이용했다. 개수대의 거름망도 꺼내서 안쪽까지 싹 닦았다.


  멈추려고 했는데 고무장갑을 벗으려니 이번에는 수저통 바닥이 걸린다. 설거지할 때 한 번씩 함께 씻기는 하지만 그 주기가 일정하지 않다. 숟가락이나 젓가락의 손잡이 부분을 수저통 아래를 향하게 하는지 위로 향하게 하는지 갑론을박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죄 없는 숟가락은 색깔도 모자라 놓는 방향까지도 논란이니 안쓰럽다) 나는 손잡이 부분을 아래로 가게 둔다. 수저통을 매일 씻지 못하니까 약간의 방어를 하는 셈이다. 그리고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뺄 때는 약간 아래쪽을 잡아서 세균으로부터 한번 더 방어한다. 용쓴다.


이미지 출처 flickr




  얼마 전부터 오른쪽 무릎이 욱신거리는데 부엌 좀 치운다고 오래 서있으니 무릎이 아릿거린다. 더 이상 서있기는 무리다. 한 시간 동안 치우고 나니 부엌이 훤하다.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발아래 깔아놓은 쿠션매트에서 발을 뗐다. 내 발자국 모양만큼 깊이 파였다가 제자리를 찾아 포옥 올라온다.


  엄마는 이 자리에 얼마나 오래 서있었을까? 부엌 바닥이 흙으로 되어있었다면 아니 댓돌로 되어있었다고 해도 엄마가 늘 서 있는 싱크대 앞자리 바닥이 조막만 한 엄마 발 모양으로 깊이 파였을 노릇이다.


  이슬아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슬아의 엄마 복희는 문득 슬아에게 묻는다. "좋겠다. 책은 한 번 쓰면 몇천 부 찍을 수 있잖아." 슬아는 그게 인쇄라는 거라며 톡 쏘아붙인다. 복희는 글로도 흔적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남지 않는 가사 노동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담아 물었을 것이다. 누군가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치우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일.


  "밥은 책처럼 복사가 안 돼. 매번 다 차려야지. 아점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저녁 차릴 시간이야."
슬아는 그제야 복희를 돌아본다.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 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잇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잇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새삼스레 슬아는 미안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민망함이 앞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때로 너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p.228  


  매일 습관처럼 차려지는 식탁 위의 축제는 설거지라는 일만 남길 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지나가버린 한 끼에 매일 복희도 우리 엄마도 나도 한 시간씩 부엌에 서있다. 발자국만 파이지 않을 뿐. 무릎은 아릿거리면서.


  그 집 수저통 바닥은 누가 얼마나 자주 닦는지, 욕실의 수채구멍 뒤쪽은 누가 닦아내는지 아무도 모르는 그 집의 살림살이는 오직 그 일을 행한 사람만이 안다. 온 가족이 그러려니 하며 살지만, 나는 아는 일. 나만 알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그래서 내가 알아 만족하는 일. 살림이란 늘 이런 식이다.


  이런 일들은 쌓이고 쌓여 가끔 분출되기도 하지만 이내 묵묵하게 반복된다. 이번 설도 누군가의 노동이 자연스럽게 스며 가가호호 웃음꽃이 넘쳤다.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과일을 깎고, 식혜를 따랐지만 사라져 버린 수 천 번의 손놀림.




  진분홍 고무장갑을 벗고 젖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오구 내 강아지들"하며 현관으로 달려 나오는 엄마의 모습에 미안함을 느낄 새가 없다. 친정에 오면 나는 수저통 바닥을 닦는 일이나 수채구멍 뒤쪽을 닦는 일에서 잠시 빗겨 난다. 엄마가 삶아 놓은 행주로 상이나 닦으며 철없이 "아싸! 꼬막무침!" 외치는 딸로 남겠다. 오늘은 미안함도 민망함도 잠시 넣어둔다. 엄마의 노동을 배경삼아 친정 천국을 누리는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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