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멀고, 멀고도 가까운 그때
우린 사자를 사자라고 부르고, 코끼리를 코끼리라고 부른다. 사자와 코끼리에게도 ‘인간’을 뜻하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을까. ‘크응’ 이라던지 ‘푸붕’ 같은 소리를 내면 그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사자를 찾아가고 야영장에 밤마다 하이에나가 찾아오는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이런 궁금증이 샘솟는다. 그들에게 난 뭘까?
매일매일 얼굴도장을 찍으니 날 기억해주면 좋을 텐데. 사실 사자가 기억하는 건 내가 아닌 자신보다 수십 배는 크고 매우 시끄럽게 움직이는 고철 덩어리다. 그래서 차 밖으로 나가면 다리를 물릴 수도 있겠지만, 차 안에서 뻗은 팔은 물리지 않는다. 내 팔을 커다란 차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자 입장에서 보면, 나는 울음소리도 희한하고 팔다리는 옆에도 달리고 위에도 달린 참 못생긴 동물이다. 뭔가 딱딱한 걸 입고 있지만 옆에 가만히 있다가 해지면 쌩- 달려가는 내성적인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친해지려고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더 멀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야생 본연의 모습 때문이다.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누우를 뜯어먹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잔인해 보이고, 부끄러운 포즈로 그루밍을 하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뻘쭘한 순간도 생긴다.
사자의 정면을 찍으려 차를 요리조리 돌린다. 정면으로 가면 고개를 돌려 봐주질 않고, 다시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차를 움직이면 누워버린다. 야생의 사자에게 ‘자, 여기 보고 웃어봐’라고 할 수도 없고... 말한들 알아듣기나 할까. 자리를 옮기다 지쳐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무심코 나를 봐준다.
단 십 분이 걸릴 수도 있고 하루 종일 걸릴 수도 있지만, 나를 봐주는 순간이 온다. 커다란 차도 아니고 햇빛에 반짝이는 창문도 아닌 내 눈을 보는 그 순간.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눈빛만 남아 서로를 아는 그 순간. 이것을 감히 ‘교감’이라고 해도 될까.
교감에 흔들렸던 정신을 붙잡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정면이잖아, 빨리 찍어야지' 하는 생각과 좀 더 오래 눈을 마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이 순간이 지나갈 텐데.. 어서 남겨야 할 텐데.. 자꾸 카메라만 만지작 거린다. 카메라를 들어 찍고 싶지만 그건 이 순간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자와 나를 검은 물체로 가로막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언제 카메라를 들어야 할까. 순간을 즐기고 즐기다가 익숙해져서 이젠 찍어도 되겠다 싶을 때 카메라를 들어야 할까. 그럼 그때의 신선한 느낌은 이미 없어져있을 텐데. 그러다간 사자도 얼룩말처럼 일상의 풍경이 되어 차를 세우지도 않게 될 것 같다. 놓치기 싫은 ‘지금’은 어떻게 잡아야 할까. 몇 년을 굴러도 답을 알 수가 없다.
커버 이미지 : 응고롱고로 스몰 마쉬 주변 숫사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