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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Apr 11. 2022

유서(遺書)

유서 아카이빙 2021

2021년 12월 15일에 작성함.



친형제에게서 찢어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은 터라 오랜만에 유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쓴 유서들을 찬찬히 읽어봤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참 삶에 미련이 없다. 아쉬운 것도 없고, 후회되는 것도 없고. 그래서 사실 유서를 쓰려고 생각을 했지만 딱히 쓰여질 말이 없다는 느낌이다. 다만 짐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내 곁의 사람들을 아꼈고, 덕분에 지금껏 살 수 있었던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표현이 늘 서투르고 성실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싶다.

내가 갑자기 죽음을 선택해 버릴까 봐 불안한 낯을 띄던 친구들에게는 이미 늦었겠지만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싶다. 어쩌면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에 대해서는 결국 해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불가항력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없어도 그대들의 삶이 유유히 흘러 좋은 곳으로만 당도하기를 끝까지 바라다가 갔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나는 죽어서 무엇이 될까?  육신이 분자로, 원자로 분해되고 땅으로 돌아가  지구를 이루다가 태양이 폭발하고 모든 요소가 다시 우주로 흝어지게 되고. 언젠가 나를 이루던 원자들이 다시 이리저리 뭉쳐서 새로운 거성이 되면, 그러다가 어쩌면 블랙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둥둥 공전을 반복하는 행성이나 암흑물질이어도 좋을  같다. 어쨋든 나는 계속  우주에 남아있을 것이다. 새로운 분자구조를 가지고  멋진 여행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겹이 시간이, 아니면 그보다  아득한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미시세계에서 시간은 무의미하다.  무의미의 축제 속에서 나는  억개의 가능성을 지닌 채 새로운 분자로 거듭나게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러니 슬플 일이 아니다. 나는 더 자유롭게 이 우주를 유영할 것이다. 인간으로의 삶도 좋았다. 좋다는 것은 불행 속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행복하지만은 않았지만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남겨진 자산은 모두 동물을 위해 쓰여지길, 봉사를 다니던 개인 쉼터와 카라에 적절히 기부되길 희망한다. 그리고 장기기증과 각막기증이 신청되어 있으니 내게는 쓰임을 다한 장기가 모두 필요한 이들에게 돌아가길 바란다. 뭐든 다 떼어가도 괜찮다. 모부가 망설임 없이 동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체되면 기증이 어려울 수 있으니까.

화장한 다음에는  맑은 바다에 먼지가 되어서 날아갈  있게 뿌려주면 좋겠다. 바다를 많이 가보지 못해서 어느 바다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보다는 바다로 가고 싶다.


죽은 자의 말이 너무 길다. 이 다채로운 삶을 밝혀준 곁의 고운 사람들의 행복만을 빌며 조용히 떠나야겠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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