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가 된다는 것
"이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들을 적어보자"
어린시절의 나는 고씨고집 중에서도 똥고집이 제일이었다. 좋게 말해 원하는 걸 어떻게든 취하는 재주있었나보다. 초등학교 시절, 비비탄 총이 어떻게나 갖고 싶었던지 "총사줘요~ 총사줘요~"를 1시간 동안 노래로 만들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어머니께 들려드렸던 기억부터가 나는걸 보니. 당시 내가 틀어준 노래를 듣고 기가 차 아무말도 못하다 "그래, 사라 사!"를 간신히 내뱉고야 말았던 어머니의 벙 찐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난 그 총을 갖고 동네 놀이터에서 20세기 배틀그라운드를 펼쳤다. 더운 여름에도 두꺼운 겨울모자와 장갑을 끼고 "가자~~~~~!!"를 외치고 어머니께 하사받은 신식 기관총(?)으로 연사하며 상대방 진영을 향해 달려나갔던 용맹무쌍한 종구는 도대체 어디로 갔나 모르겠다. 고씨고집이 그정도로 어디 명함이나 내밀었겠나. 인근에서 잡아온 메뚜기를 화장지에 말아 불에 구워먹고는, 맛있다며 친구네 집 옥상에서 구워먹다가 천막을 홀라당 태워먹기도 했다. 그 덕에 우리 일당은 팬티바람으로 집에서 쫒겨나 동네를 뛰어다니며 온 동네에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우리집은 아지트였다. 대개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시던 어머니 덕(?)에 우리집은 밤이 늦도록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밤이면 빛이 들어오는 창문마다 이불을 걸어놔 완전 깜깜하게 만들어놓고 신나게 배게를 흔들어댔다. 3살터울의 형 친구들이 많은 날엔 난 늘 티비 뒤에서 숨죽여 있다가 한바탕 싸움이 진정되고 나면 뒤늦게 전장에 뛰어들어 교란시키는 교활한 전략을 종종 구사하곤 했다. 당시 온 국민의 국뽕을 책임지던 박찬호의 체인지업이 집에 들어온 후로는 우리집이 동네 무료오락실이 되었다. 짝수 명이면 반으로 찢어지고, 홀수 명이면 제일 어린 애 - 대개 나였다 - 가 깍뚜기가 되어 격투게임, 비행기 게임 등으로 승부를 벌였다. 아무리 허저의 날라 박치기, 조운의 부메랑 장풍, 마초의 풍차돌리기로 승부를 벌여도 형들의 정교한 콤보에 늘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던 나는 간식들이나 축내며 형들의 승부를 응원하는 쪽으로 물러나야 했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그 치열한 승부의 현장에 있는 것 만으로도 꽉 쥔 내 손은 늘 땀으로 흥건해지기 일쑤였다.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놀았기에 다치기 일쑤였다. 형들처럼 갖은 재주를 부리며 미끄럼트를 타고 내려오다가 쿵 떨어지기도 했고, 또 형들처럼 폴짝거리며 징검다리를 건너다 머리를 찧어 꼬매기도 했으며, 주말마다 놀러가던 어머니 일터에서 장난치며 놀다가 기계에 깔리기도 했다. 거짓말 양념을 좀 보태서 이정도면 초등학교 시절에 1년에 한 달은 통깁스를 해서 강제적으로 안식월을 보낼 지경이었다. 그렇게 아플 때는 늘 일만하시던 어머니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오셨다. 함께 병원에 가고, 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살냄새를 맡으며 비로소 안심을 했다. 펄펄 끓는 열로 인해 밤잠을 설칠 땐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놓아주며 밤새 머리맡에서 맴돌던 어머니의 실루엣을 느끼며 평안을 느꼈다.
어젯 밤에 둘째가 입에 물고 있는 딸기 장난감을 첫째가 억지로 빼려다가 그만 둘째의 입에 피가 나고 말았다. 돌도 안된 어린 아가의 입술에서 피가 송골송골 배어나와 턱받이를 적시자 첫째는 비로소 놀랐는지 큰 소리로 울음을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이걸 어떡하나, 이 오밤중에 처치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어떻게 찾아 가야하나 오만가지의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도 첫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동생 얼굴에 피나는 거 보이니? 네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만날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동생이야. 너는 이 동생의 누나잖아. 그치? 그러니 네가 잘 지켜줘야 해. 알겠니?" 그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둘째의 출혈은 금방 멎어 병원에 갈 시름은 덜었다. 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어쩌면 첫째의 간절함 덕에 금방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뚱딴지같은 생각 속에서 맴돌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
어린 생명들을 키우며 어머니 생각을 더 많이, 자주 하게 된다. 그때는 차마 헤아리기 어려웠던,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일들을 제쳐두고 아픈 종구를 떠올리며 달려왔을 어머니의 심정같은 것들이 떠오를 때면 마음 속이 번잡하게 뒤채이곤 한다. 아픈 자식들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내가 그들을 돌봐줘야 한다는 다짐같은 것들이 이제는 어머니의 품에서 내게로 어느새 살그머니 내려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당시에 나는 어머니가 온 힘을 들여 세워놓은 울타리 - 단 한 번 본 적도, 그렇다고 어머니께 물어본 적도 없지만, 그 울타리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안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내가 그 울타리를 세울 차례가 되었다. 지금 내게 바람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어린시절의 종구가 그랬듯, 마음껏 자기 날개를 펼치며 놀 수 있는 울타리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