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1. 글쓰기에도 시작이라는 게 있을까? 우리집 첫째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도화지에 낙서를 해놓고 이게 수박이야, 딸기야. 이게 엄마, 이게 아빠... 하는 것도 글이라 할 수 있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나의 인생길에 처음으로 글감을 머릿 속에서 오랫동안 굴리다 정돈된 글을 써내려간 첫 시작을 꼽아보면 군대 시절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2. 대한민국의 도도한 공교육 흐름을 거스를 생각도 못한 채 교과서와 참고서들만 강제로 읽어왔던 시절을 지나,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나의 의지로 글을 찾아읽기 시작했다. 취향이라 할 것도 없었고, 그저 손에 집히는대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입영통지서를 받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골에서 군복무를 했다.
3. 같은 내무반이 아닌 이상, 누구도 만날 일이 없는 깊은 산골에서 비로소 글을 만났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을 글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로 불가의 책들이 많았지만, 그 틈에 문학도 있었다. 그 중 장영희의 책을 오래 두고 읽었다. 지금도 내 문학적 감수성의 뿌리 어딘가에 장영희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휴가를 다녀올 때마다 그가 소개해주는 책들을 집어와 관물대에 차곡차곡 쌓았다.
4. 글을 뜨겁게 만나느라 겪었던 웃지못할 일들도 있다. 교환대에서 근무를 하며 책을 몰래 꺼내 읽었는데, 마침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문장과 만나 눈시울을 붉히다 그만 대대장의 직통전화를 제때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완전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실컷 돌면서도, 당시 책에서 만난 문장들을 떠올렸던 걸 보면, 나라를 지킬만한 깜냥은 되지 못하는 듯 했다.
5. 특히 크기가 작은 시집을 좋아했다. 시집은 허벅지에 달려있는 건빵주머니에 넣어도, 방독면가방 귀퉁이에 넣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짧고 강렬한 운율은 빠르게 눈으로 읽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서 굴리기에 좋았다. 행군을 다닐 때마다 건빵주머니 양 옆에 시집을 한 권씩 꽂고 다녔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휴식시간동안 선임들 몰래 손전등을 켜고 빠르게 글을 읽고, 50여분이 넘는 시간 동안 걸으며 아까 읽은 글감들을 마음 속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긴 행렬과,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은하수 아래에서 사막 한가운데를 헤치고 다니는 순례자 행렬을 떠올리기도 했다.
6. 험난했던 그 시절을 기록했던 다이어리의 첫머리시작과 끝의 마음"
1. 글쓰기에도 시작이라는 게 있을까? 우리집 첫째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도화지에 낙서를 해놓고 이게 수박이야, 딸기야. 이게 엄마, 이게 아빠... 하는 것도 글이라 할 수 있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나의 인생길에 처음으로 글감을 머릿 속에서 오랫동안 굴리다 정돈된 글을 써내려간 첫 시작을 꼽아보면 군대 시절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2. 대한민국의 도도한 공교육 흐름을 거스를 생각도 못한 채 교과서와 참고서들만 강제로 읽어왔던 시절을 지나,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나의 의지로 글을 찾아읽기 시작했다. 취향이라 할 것도 없었고, 그저 손에 집히는대로 읽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입영통지서를 받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골에서 군복무를 했다.
3. 같은 내무반이 아닌 이상, 누구도 만날 일이 없는 깊은 산골에서 비로소 글을 만났고, 내면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을 글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로 불가의 책들이 많았지만, 그 틈에 문학도 있었다. 그 중 장영희의 책을 오래 두고 읽었다. 지금도 내 문학적 감수성의 뿌리 어딘가에 장영희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휴가를 다녀올 때마다 그가 소개해주는 책들을 집어와 관물대에 차곡차곡 쌓았다.
4. 글을 뜨겁게 만나느라 겪었던 웃지못할 일들도 있다. 교환대에서 근무를 하며 책을 몰래 꺼내 읽었는데, 마침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문장과 만나 눈시울을 붉히다 그만 대대장의 직통전화를 제때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완전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실컷 돌면서도, 당시 책에서 만난 문장들을 떠올렸던 걸 보면, 나라를 지킬만한 깜냥은 되지 못하는 듯 했다.
5. 특히 크기가 작은 시집을 좋아했다. 시집은 허벅지에 달려있는 건빵주머니에 넣어도, 방독면가방 귀퉁이에 넣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짧고 강렬한 운율은 빠르게 눈으로 읽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서 굴리기에 좋았다. 행군을 다닐 때마다 건빵주머니 양 옆에 시집을 한 권씩 꽂고 다녔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휴식시간동안 선임들 몰래 손전등을 켜고 빠르게 글을 읽고, 50여분이 넘는 시간 동안 걸으며 아까 읽은 글감들을 마음 속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긴 행렬과,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은하수 아래에서 사막 한가운데를 헤치고 다니는 순례자 행렬을 떠올리기도 했다.
6. "사랑은 -삶보다 앞서고- 죽음 -이후이며- 창조의 근원이며, 그리고 지구의 옹호자-"
좌충우돌했던 그 시절을 기록했던 다이어리의 표지에 적힌 이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잠시나마 이 문장이 손짓하는 기억을 따라 폭설이 내리는 새벽, 온갖 무기로 무장한 채 경계를 서며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떠올렸을 20대 초반의 종구를 다시 만나고 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미 청년의 시절을 지나 장년의 때로 접어드는 지금도 그 시절의 고민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닌가 싶어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7. 이러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올해를 넘어가겠다 싶을 때, 작은 글쓰기 모임을 만났다. 그리고 더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절박함이라는 동앗줄을 붙잡고 뛰어들었다. 육아에, 공부에, 영상 노동에, 식당 노동에, 운동까지. 매일매일 해내야하는 과업 속에 글쓰기라는 또 하나의 일과가 더해지는 게 늘 부담이었다. 그래도 이 바쁜 일과 속에서 마지막 문장을 토닥이고, 업로드를 하는 순간, 아... 또 이걸 해냈구나. 하는 보람을 느끼는 게 퍽 기쁘기까지 하다.
8. 이 기쁨에 젖어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한다. 쓰는 내가 되어도, 쓰지 않는 내가 되어도 괜찮다고. 나의 존재는 그런 걸로 훼손되어서는 안된다고. 잘쓰고 못쓰고의 기준에 휘둘리지 말고, 그저 나의 생각들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데에 만족하자고. 여전히 사랑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 떠오르는 생각들을 어떻게든 붙잡아서 써 내려가며 삶보다 앞서고 죽음보다 뒤에 있는 사랑에 대해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도 원대한 여정을 포기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