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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Sep 19. 2016

낭중지추(囊中之錐)

뾰족했지만 괜찮았다. 앞으로도 괜찮을까?


그리 오래 살지 않은 내 삶을 반추하면, 항상 돌아오는 답은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사자성어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기에 송곳 같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되려 재능보다는 모남의 느낌이 크다. 최근 화제가 된 웹툰처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찌르는 송곳은 아니다. 그저 타인의 자존심을 찌르는, 익히 문제 될 것 없는 부분을 찌르곤 하는 송곳이었다.


난 항상 송곳이었다.

송곳으로서의 자아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아마도 중2 여름이었다. 미술시간 모두가 차례대로 자신이 만들었던 공작품을 소개했다. 그때 어떤 공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날이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송곳이라는 것을 자각한 첫날로 기억한다.



줄곧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차례였다. 선생은 공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를 보고 말했다.


"이 작품에 대해서 자신의 느낌을 말해 볼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가운데 나는 손을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날 내가 말했던 대답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친구의 울그락 불그락해진 얼굴과,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말과, 수업이 끝난 후의 친구와의 주먹다짐만이 생각날 뿐이다.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다는 의식도 없었다. 난 그저 솔직히 공작품을 보고 느낀 말을 입 밖으로 꺼냈을 뿐이었다.

그때 난 처음으로 내가 타인에게 뾰족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난 일관성 있게 송곳처럼 선생들을 찔렀다. 지독한 학습 편식 덕에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관심 있는 과목은 있었다. 그리고 관심만큼이나 몰두하고 탐구했다. 그러나 내 탐구심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항상 선생들의 불편한 눈빛만을 마주했을 뿐이다.


다당제와 양당제를 설명하던 정치 선생에게, 우리나라는 왜 다당제면서 양당제의 특징을 모두 띄고 있는 거냐는 질문을 했을 때도 불편한 눈빛을 만났다. 한용운을 설명하던 문학 선생은 한용운이 사랑하던 님이 조국이 아니라 숨겨둔 애인일 수도 있지 않냐는 내 질문에 쓸데없는 소리라며 힐난했다.


근현대사 시간에 좌익과 우익의 갈등에 대해서 설명하던 국사 선생은 그중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인물이었다. 난 지금도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구의 한국국민당이 우익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송진우의 한국민주당 계열을 현재 보수 정당의 뿌리라 하나요?"


이 질문은 국사 선생이 매를 들게 만들었다. 학생은 수능에 나올 것만 공부하면 된다는 훈계는 덤이었다. 이 질문이 국사 선생의 무엇을 그렇게 불편하게 찔렀을까?


20살이 넘어서야 나는 한국 사회의 암묵적 룰을 알게 되었고, 내가 그 룰을 건드리기 때문에 불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고등학교 시절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대학에 간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학우들은 결코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다지 관심 있던 것이 공부가 아니었던 탓에,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러다 문득 관심이 있던 주제를 말하던 교수님에게 던진 내 질문에, 오랜 시간 앓던 고민의 답을 찾았다. 질문에 대한 답이 고민의 답은 아니었다. 내 주위에 있던 학우들의 수군거림이 내 고민의 답이었다.


아 쟤는 왜 수업시간 마지막에 질문 던지고 그래, 대충 가지


돌이켜보면, 난 질문을 좋아했다. 그리고 비판하기도 좋아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던 날과, 비판의 말을 입에 올리던 날은, 내가 세상과 맞지 않다는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던 날이곤 했다. 한국 사회에서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문화라는 것을 그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질문은 계속했다. 비판도 계속했다. 그것은 학생이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나를 가장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점은, 고집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남들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내가 불편하고 싶지 않아 질문을 계속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학문을 하게 된 기회를 얻은 후로는 더 내 욕심을 위해 질문했다. 다행인 것은 학생이었기에, 그래도 송곳인 내 모습을 용인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 질문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내 질문에 관심을 주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내 질문에 대해 함께 답을 고민하며 담배를 피우던 교수님들도 간혹 만났고, 술자리에선 새벽까지 함께 질문의 답을 찾던 학우들도 간혹 있었다. 그들은 내 질문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아니 간혹 질문 내용을 불편해했을 수는 있어도, 질문 행위 자체를 불쾌해하지 않았다.


간혹 자신의 권위를 상하게 한다는 생각에 버럭 하던 교수님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교수님들은 옹졸하게 내게 해코지하진 않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을 가슴으론 아니어도, 머리론 이해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근거로는 별게 없다. 그 교수님들이 내게 하사한 학점이 항상 내가 수긍할만한 학점이었다는 것으로, 그들의 심성을 추측할 뿐이다.


대학시절을 거치고 내게 남은 건 학위증, 전공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나에 대한 정체성의 확립이었다. 남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궁금한 것은 묻는 뚝심, 그리고 알량한 지식을 기반으로 비판적 사고를 한다는 고양감 이것이 내가 확립한 나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자랑스럽진 않지만, 29년간 세상과의 이질감을 버티며 만든 내 정체성이었다. 즉 나다움의 완성이라고 믿었다.


정체성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대학을 졸업했다. 남들같이 취업도 했다. 남들처럼 신입 교육도 받았다. 그러나 남이 보기엔 남들 같진 않았나 보다. 난 그저 살아왔던 대로 행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였을까? 굳이 변명하자면, '내가 그동안 송곳을 숨겼던 게 아니라 주머니가 숨겨줬다는 사실을 잊었던 탓'이리라 생각한다.


그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저 새로운 생각이 들어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행동이 신입답지 않게 보였나 보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주던 교수가 사라졌고, 비판을 수긍하던 선후배가 사라졌고, 그 자리엔 경력으로 가득 찬 선임들이 앉아 있었다. 날 둘러싸던 주머니는 어느새 바뀌어있었다. 그리고 난 다시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이 되었다.


다시 송곳이 된 나는 황급히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을 불렀다. 그들도 나만큼은 아니었어도, 꽤나 학교에선 송곳이었으니 답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말했다.


"이제 사회인이니까, 적응일 뿐이야"


난 송곳이다. 아니 송곳이었다. 그리고 송곳일 때가, 가장 나다웠다.


난 과연 몇 년 뒤,


사회인이니까란 답을 하게 될까? 아니면 여전히 송곳으로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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