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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제 Apr 03. 2021

독일 기자협회보 이름이 ‘여기자’가 된 까닭

독일의 성 중립 언어 사용 노력

독일 기자협회(DJV)에서 발행하는 잡지의 이름은 ‘기자(Journalist)’다. 엄밀히 말하면 ‘남성 기자’다. 독일어 명사는 남·여·중성으로 구분되어 있고,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는 대부분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다. 물론 기본값은 남성이다. 기본값에서 ‘–in’을 더하면 ‘여성’으로 의미가 바뀐다. 


저널리스트(Journalist)는 남성 기자, 저널리스틴(Journalistin)은 여성 기자다. 복수형도 일일이 표시해야 한다. ‘저널리스티넨 운트 저널리스텐 (Journalistinnen und Journalisten)’, 여성 기자들과 남성 기자들. 안타깝지만 독일어에서 ‘기자’라는 성 중립적인 단어가 없다. 모든 성별을 지칭하기에는 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가장 짧고 효율적인 기본값을 관성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독일기자협회가 발행하는 잡지도 그동안 자연스럽게 ‘(남)기자’라는 이름으로 발행됐다. 그런 기자협회보가 2020년부터 두 가지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다. 바로 ‘남기자’, ‘여기자’다. 총 발행 부수 3만2000부 중 1만6000부는 ‘남기자’, 남은 1만6000부는 ‘여기자’로 인쇄한다. 구독자들에게는 무작위로 배포한다. 


기자협회보 편집장 마티아스 다니엘(Matthias Daniel)은 지난 1월 이 같은 소식을 알리며 “몇 년간 지속적으로 여성 독자들로부터 잡지의 이름이 더 이상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고, 모든 독자들을 포용하려 한다”고 말했다. 잡지의 공식 명칭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내린 결정이다. 



독일 기자협회가 발행한 '남성 기자'와 '여성 기자' ⓒDJV


독일어는 기본값을 남성 단어로 쓰기 때문에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사회적으로는 ‘성 중립 단어’를 쓰려는 노력이 이어진다. 어떤 직종이나 그룹을 지칭할 때 꼭 남성, 여성 복수형을 같이 쓴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공지문을 보낼 때 ‘스튜덴티넨 운트 스튜덴텐(Studentinnen und Studenten)’, 여학생들 그리고 남학생들이라고 쓰는 식이다. 너무 길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불만도 많다. Student*innen, 이렇게 한꺼번에 쓰되 중간에 기호를 넣어 남성 여성을 구분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고민 끝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스튜디렌데(Studierende), 성 구분 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다. 학생이라는 객관적 신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이처럼 성 중립 언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독일어의 고뇌가 크다. 대체적으로는 두 가지 성을 모두 지칭하는 방식이 더 자주 보인다. 


미디어 이슈와 관련 정책을 전문적으로 보도하는 넷츠폴리틱(Netzpolitik.org)은 이러한 성 중립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곳 중 하나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남성 독자들의 불만이 많았다. ‘왜 독일어를 못나게 사용하냐’라는 비판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이에 넷츠폴리틱은 지난 1월 “우리가 성 중립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라는 기사를 통해 “언어는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이 가능한지를 나타낸다. 우리는 모든 성별의 인간이 보이는 사회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교육 및 공공기관에서도 성 중립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베를린시는 시 행정규칙을 통해 시 정부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언어적 평등에 유의해야 한다”고 명시해놨다. 라이프치히 대학은 2013년 대학 기본규약(Grundordnung)에 나오는 모든 남성 인칭 명사를 여성 명사로 대체했다. 남성 여성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아예 여성 명사만 기본형으로 사용했다. 급진적인 결정이라며 당시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물론 기본규약에만 명시된 부분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크고, 일상적인 문서 사용에는 남성 여성형을 모두 사용한다. 


독일은 근본부터 성차별적인 언어 탓에 숱한 사회적 에너지를 쓰고 있다. 요즘에는 남성 여성이 아닌 제3의 성까지 나오고 있는데, 제3의 성을 포함한 성중립 언어 표기는 어찌하려고 할까. 새삼 한국의 성 중립 단어가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기자’는 그냥 ‘기자’니까.



2020.03.15 미디어오늘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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